섹스온더카우치(6)

강의록 2010/03/09 23:49 lacan
페니스와 팔루스 : 무엇이 다를까?

페니스의 어원을 따져보자. 그리스어를 찾아보면 페니스의 뜻은 대체로 꼬리라고 한다. 페니스는 정말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면 팔루스는 다르다. 팔루스도 페니스를 가리킨다. 하지만 팔루스에 다른 뜻도 있다. 팔루스는 두드러진 것, 돋보이는 것을 뜻한다. 팔루스는 발기에 가깝다. 발기한 성기는 확실히 돋보인다. ㅎㅎ 따라서 팔루스를 찾는다/얻는다고 할 때, 확실히 어떤 것이 자극한다.

남자와 여자가 팔루스를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여자는 권력있는 남자와 함께 있다. 재미있게도 예쁘고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재벌과 함께 있는 설정/구도는 영화나 연속극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능력도 없고, 못생긴 남자와 예쁘고 젊은 여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연인은 영화나 연속극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런 연인은 드문 것 같다.

여자에게 능력있고 멋있는 남자가(능력에 반드시 경제력이 포함된다.) 팔루스라면, 남자에게 소유물이 팔루스이다. 여자에게 그런 남자와 어울리는 것, 그런 남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남자는 자동차와 부동산, 여자를 소유물처럼 가지려 한다. 남자에게 이런 것이 팔루스이다. 하지만 남자가 이렇게 생각한다. 남자가 그런 팔루스를 가지고 있어야 여자에게 사랑을 받는다. 이렇게 본다면, 여자가 원하는 것이 팔루스이지만 남자는 자동차, 부동산, 경제력, 명성을 지녀야만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동차, 부동산, 재력... 이런 것은 팔루스의 상징이다.

여자가 나쁜 남자에게 끌린다는 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쁜 짓/태도에 끌린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나쁘다는 말은 남자가 가진 독특한 능력을 뜻한다. 모든 남자가 강력한 재력과 명성을 가지나? 그렇지 않다. 그래도 많은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여 결혼한다. 결혼한 남자는 적어도 배우자를 유혹할만한 팔루스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가지지만 여자는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여자에게 "보여지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남자는 여자의 이런 특징을 견디기 힘들다. 여자가 나타날 때, 여자는 애인에게도 나타나지만 다른 남자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애인이 굉장한 미인이라고 해보자. 애인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예쁘게 단장을 했다. 애인은 분명 남자를 위해 단장을 했지만, 다른 남자도 결국 애인을 본다. 팔루스를 주로 "가진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다른 남자가 애인을 보면 조금 불편해진다. 그래서 남자는 되도록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한다. 도저히 다른 남자가 애인을 넘보지 못하도록. 재벌의 애인을 누가 넘보겠는가? 재벌만큼 강력하지 않다면..




성공의 기준(2)

생각만들기 2010/03/08 00:10 lacan
이제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얘기요!

일단 대안이 아닌 것부터 한번 따져보자.

ㄱ) 우리는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추구는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당신이 행복하게 놔두지 않는다. 당신이 정말 행복을 얻었더라도 당신을 기어이 불행하게 만든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는 행복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ㄴ)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

요즘 유행하는 지침이다. 이것부터 분명히 하자. 욕망을 정말 포기하지 않을 수 있나? 그렇다. 당신은 욕망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다. 욕망을 고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 지침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 않다. 당신은 욕망을 고수할 수 있다. 정말 요점은 다른 곳에 있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 이것은 다소 허망하다. 이 주장은 대체로 칸트의 윤리학을 따른다.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다. 당신이 무엇을 욕망하는가?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취미생활을 포기하지 않을거야!! 이런 욕망? 재미있게도 바디우는 충실성을 따지면서 정치, 사랑, 과학을 지적한다. 왜 취미생활이 아니라 과학일까? 지젝의 말처럼 이 지침을 따르면 새로운 "기회"가 생기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새로운 생활터전까지 마련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사회가 정립되어야 하는데, 그냥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기회만 제공하는 것 같다. 그 후에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 못한다. 정말 제대로 된 지침이라면 새로운 사회, 새로운 공동체까지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지침은 개인의 고독한 투쟁으로 끝나버리기 쉽다.


ㄷ)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남에게 도움이 될 때,
ㄹ)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남이 나를 인정할 때,

ㅁ) 남이 무슨 일을 하든 나에게 도움이 될 때,
ㅂ) 남이 무슨 일을 하든 내가 남을 인정할 때,

위 4 주장이 상당히 중요하다. 먼저 도움과 인정이 같이 가야 한다. 남이 나에게 도움을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런데 도움만으로 부족하다. 내가 남을 인정해야 한다. 남이 나를 도운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남은 아마 실망할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이란 구절이 상당히 중요하다. 당연히 내가 남에게 해를 입혀선 안된다. 이 조건 아래서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남이 도움을 받고 남이 나를 인정도 한다고 생각해보라. 이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이런 사회에서 아마 사람들이 직업 종류에 지금처럼 목을 매달지 않을 것이다. 직업종류는 사실 인정욕구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청소부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자신이 청소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일하는 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 하지만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지든 남이 당신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직업종류 때문에 맘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외국인이 신입생 면접을 했다. 신입생에게 앞으로 어떻게 생활할 거냐고 물었더니 신입생이 너무나 자세하게 대답했다. 외국인은 흠칫 놀랬다고 한다. 이제 겨우 20살인데,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말하다니... 외국인이 보기에 한국의 대학교 신입생은 지나치게 사회에 편입되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미리/앞질러 성취하려는 의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 외국인은 이것이 다소 천박하게 보였나 보다. 인생을 궁리하기 보다 그저 생존하기에 목을 매는 젊은이. 아마 외국인에게 한국 젊은이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물론 한국 형편이 넉넉지 않다고 변명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젊은이에게 인생을 궁리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런 변명도 외국인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을 인도하는 기준이 사회적응이라면, 우리는 인생궁리보다 적응에 매진할테니까. 여기서 이렇게 물어보자. 사회적응을 목적으로 살면 안되나? 무슨 잘못이 있나? 대체로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쓰지 않나? 그런데 우리 자신을 잘 관찰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 적응에 성공한 사람을 좋게 평가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도 그는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회적응만 신경쓴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지만 조금은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그는 분명 성공했지만 속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ㄱ) 사회 적응에 성공했다. 하지만 사회적응만 신경쓰는 사람은 이상하게 보인다.

이런 사람은 어떤가? 사회 적응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고귀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부와 지위가 약하다. 돈도 많이 모으지 못했고 사회적 명성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고귀한 목적을 추구하며 남다르게 행동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를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말 그 사람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가 고귀한 목적을 추구한다고 인정하지만 그의 삶을 모범으로 삼지 않는다. 쉽게 말해 자식에게 그 사람처럼 살라고 권하지 않는다.

ㄴ) 우리는 고귀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사람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다.

일단 이것을 기억하자. 사회적응과 다른 고귀한 목적?은 정말 고귀한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환상에 가깝다. 조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한다.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자원봉사도 하고, 기부도 하며, 사회활동도 한다. 나는 사회 적응만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적어도 스스로 이렇게 외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삶이 과연 주장 ㄴ)과 다른지 따져봐야한다. 그가 하는 사회활동/선한 활동은 사회적응의 윤활유와 같다. 그가 여가를 이용하여 하는 활동은 사회적응을 바꾸거나, 사회적응에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적응을 보충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차원을 생각해봐야 한다.

ㄷ) 사회적응활동은 어떤 윤리적 차원을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차원은 사회적응활동을 보충한다.

예를 들어 영화나 연속극의 주인공은 세속적 성공에 미쳐 모든 것을 쏟아붇는다. 하지만 그는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깨닫는다. 과감히 성공의 길을 버리고 "자기 삶?"을 찾아 떠난다. 그런데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 영화처럼 세속적 성공이 허망하다고 해보자. 아니, 그냥 세속적 성공은 정말 허망하다고 해보자. 그런데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극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여기서 사람들이 자주 제시하는 대안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세속적 성공이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만들어 내지 않는지 의심해봐야 한다. 한 술 더 떠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물리치는, 대안적 삶이 어쩌면 세속적 성공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따라서 나는 일단 이런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ㄹ) 사회 적응은 사회 적응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사회적응을 넘어선 삶을 희미하게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삶이 정말 있다 해도 그것은 사회적응을 무력하게 만들만큼 강력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적응을 넘어선 삶은 사회 적응이 만들어낸 허상일지 모른다.

ㄹ)을 사회적응의 아포리아라고 불러보자. 사회적응의 아포리아를 파괴해야만 참된 윤리를 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적응의 아포리아에 갇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