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좌익과 전달

생각만들기 2010/02/07 23:14 lacan
나는 옛부터 좌익정치가 망했다고 생각했다. 이 글에서 나는 이유를 간단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좌익정치가 왜 망했나? 흔히 말하는 좌익 이론가와 좌익 (문화) 평론가를 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밈을 한번 생각해보자.

ㄱ) A는 A를 낳는다.

이 논리는 좌익이론에도 적용된다. 그렇다면 좌익이론은 무엇을 낳을까?


ㄴ) 좌익 이론은 좌익 이론을 낳는다.


보 통 이렇게 생각한다. 좌익이 선호하는 주제가 있다. 좌익은 대체로 진보적 정치를 추구하고, 자본주의의 몇몇 경향에 반대한다. 주로 이런 방향으로 글을 쓰고, 이론을 펼친다. 그들의 글을 읽은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따라서 좌익이론은 좌익이론을 낳는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다. 하지만 내용은 조금씩 바뀐다. 좌익이론을 선호하거나, 좌익 정치를 선호해도 조금씩 다른 내용을 주장하기도 한다. 오히려 내용보다 다른 것이 계속 복제/전달된다.


ㄷ) 좌익 이론은 태도를 낳는다.


이것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 좌익평론가의 글을 읽고, 사람들은 좌익평론가의 "생각/의견"을 배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태도를 배운다. 태도가 전달된다. 좌익 평론가의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은 좌익 평론가처럼 살아간다. 태도가 전달된다. (혹은 복제된다.)


이 주장은 조금 허탈하게 보인다. 태도가 전달되고 복제된다고 해보자. 당신은 좌익이론에 해박하고, 나름대로 비평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체제에 전혀 위협을 주지 않는다. 당신은 좌익 평론가처럼 말하고 행동하니까. 오늘날 좌익평론가는 체제에 위협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 정치 활동가의 글을 한번 읽어보라. 당신이 레닌의 글을 한번 읽어보라. 레닌은 독자가 자신처럼 행동하기 원하는 것 같다. 당신이 레닌의 의도를 제대로 읽었다면, 당신은 레닌처럼 행동할 것이다.

내 말이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이 잠시 편견을 내려놓고 역사를 한번 보라. 20년전 한국좌익이론을 한번 찾아보라. 그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살펴보라. 지금 좌익이 하는 얘기와 상당히 다르다. 주요 이론가도 다르다. 그런데 그 때 좌익이었던 사람이 지금도 대체로 좌익을 선호한다. 결국 무엇이 전달되었나? 알튀세르나 라깡? 아니다. 좌익스런 태도가 전달되었다. 그런데 좌익이론가 가운데 행동을 촉구하거나 당신에게 정치적 결단을 요구한 사람은 거의 없다. 왜? 그들은 대체로 좌익평론가이며, 좌익평론가의 태도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ㄹ) 체제를 위협하는 태도를 전달해야 하나? 그렇다면 무엇이 체제를 위협하는 태도인가?

[물론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체제를 꼭 위협해야 하나?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 이 문제를 풀기위해 먼저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다.


ㅁ) 이론가는 이론가다. 이론가가 실천가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보 통 ㅁ)를 많이 말한다. 하지만 나는 태도가 전달된다고 말했다. 이론가가 이론을 말하더라도, 은밀히 태도가 전달된다. 따라서 ㅁ)을 주장할 수 있지만, 전달되는 것은 태도이다. 반면, 예언자나 사도는 말과 존재를 그렇게 분리하지 않는다.

무엇을 전달되는지 고려한다면, 흔한 대립도 피할 수 있다. 보통 이론가는 실천적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고 구박한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이론가가 실천적 대안을 내놓았다고 하자. 당신은 대안을 실천할 마음이 있나? 여기서 사람들은 다시 이렇게 따지려고 한다. 대안이 과연 현실적인지 따져보자... 결국 논의는 계속 된다. 행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의 분리로 고민하는 것은 그다지 소득이 없다. 앞서 말한대로 태도가 전달된다면, 우리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ㅅ) 이론가든, 실천가든, 이론을 펼칠 때, 어떤 행동을 할 때,  실제로 무엇이 전달되나?

ㅇ) 말과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까?


=> 이것이 훨씬 중요한 것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내용을 가지고 떠든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자세히 보라. 지금 도덕적으로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태도가 전달되고, 반복되는지 주시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날 좌익이 떠드는 주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내용은 아무 상관이 없느냐 => 좌익과 우익이 주장하는 내용은 분명 다르다. 당신이 좌익에 속했다면, 일단 그 쪽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나의 주장에 따르면, 좌익안에서 내용의 차이는 큰 뜻이 없다.

**그래도 내용에 따라 결국 행동이 결정되는게 아니냐 : 하지만 나는 다시 묻고 싶다. 정말 그렇더냐? 내가 볼 때 이 질문을 많은 좌익이론가가 무시했다. 어떤 이론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했다. 그들이 "누구처럼" 말하는지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배우고 행동하는지 알아보자.. 그런 뜻인가? : 일반적 학습심리학보다 학습사회학을 말하고 싶다.

섹스온더카우치(4)

강의록 2010/02/04 13:05 lacan
1. 똥이나 항문 이야기는 확실히 거북하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욕가운데 똥이나 항문을 활용하는 욕이 많다.

2. 왜 정신분석은 똥이나 항문 이야기를 하는걸까? 심지어 그것을 부모와 아이의 관계로 해석할까?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닐까? 아무런 뜻이 없는 현상에 너무 많은 뜻을 부여하지 않는가?

=> 바로 여기에 정신분석의 핵심이 숨어있다. 정말 프로이트가 말한대로 무의식이 있다면, (어떻게 있든 간에) 우리는 무의식에 쉽게 다가갈 수 없고, 쉽게 이해할 수도 없으며, 익숙하게 만들 수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똥과 항문은 바로 몸의 무의식이다. (당신은 항문을 볼 수 없다. 거울을 이용하지 않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항문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3.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팔루스

3-1. 리처드 부스비는 자기 경험을 아주 재미있게 풀어낸다. 전통적 정신분석에 따르면, 아빠에게 페니스가 있지만 엄마에게 없다. 아빠에게 있다. 엄마에게 없다. => 하지만 사람들은 자주 오해한다. 정신분석이 여자를 부족한 존재?로 본다고... 정확하게 말해 정신분석이 그렇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은 아이의 인지를 보고한다. 즉 아이는 그렇게 "인지"한다.

3-2. 그래서 부스비는 자기 아이에게 정말 바로 가르쳤다고 한다. 아빠에게 남자 성기가 있고!, 엄마에게 여자 성기가 있다고. 즉 아빠는 무엇을 가지고 엄마는 뭔가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아빠도 남자 성기를 가지고, 엄마도 여자 성기를 가진다. 엄마는 아빠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뭔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이에게 그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도 그 말을 이해했다.

=> 그래도 아이는 뭔가 오해한다고 한다. 부스비는 여기서 조금 놀랐다고 한다. 아이는 나중에 부스비와 부스비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에게 털이 있고, 아빠에게 털과 페니스가 있다고!! 아이가 볼 때 (4세 아이) 엄마의 성기는 털이다. 정말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이다. 그리고 아빠에게 털과 페니스가 있다. 따라서 정신분석과 반대로 가르쳐도 아이는 여전히 남자에게 하나가 더 있다고 인지한다. 결국 아빠는 엄마에 비해 하나 더 가진 셈이다. 설사 엄마에게 결여된 것이 없더라도.

(물론 이것은 오해이며, 나이가 들면 오해가 풀어진다.) => 정신분석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오해이다.

몹쓸교육학(3)

생각만들기 2010/01/30 20:48 lacan
무 엇이 가장 좋은 교육인가요? 간단하고 훌륭한 답이 있다.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 학생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목적을 세워 하는 교육. 이런 교육이 가장 좋다. 그렇지 않나? 그런데 당신은 이런 교육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당신은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교육? 그런 교육은 당연히 좋다. 강조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교육을 그렇게 한다면, 그런 교육은 곧바로 실패할 것이다.

ㄱ)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을 할 수 있다. 단지 그런 환경이 되지 않았다. 환경을 잘 조성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교육할 수 있다.

ㄴ) 우리는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꿈꾼다. 하지만 꿈은 꿈이다.

ㄷ)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을 하면 당연히 좋다. 하지만 환경에 상관없이 그런 교육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의 소원을 어떻게 들어주나?

ㄹ) 우리는 이미 그런 교육을 한다. 우리가 의식을 못해서 그렇지.

ㅁ) 능력과 환경보다 교육의 뜻을 먼저 정해야 한다.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은 교육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교육에 맞지 않다.


** 가장 훌륭한 교육이 무엇입니까? 학생에게 물어보라. 아마 당신은 조금은 냉소적 답을 듣게 될 것이다. 한국 학생에게 이 질문이 곧 함정이다. 왜 가장 훌륭한 교육을 고심해야 할까? 정말 학생에게 선택할 권한을 준다면, 학생은 그냥 교육을 "하지 않기로" 결심할 것이다.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교육을 생각하는 짓은 쓸데없다.

너무 냉소적인가? 일단 가장 훌륭한 교육이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이라고 해보자. 우리는 그런 교육을 할 수 없나? 재미있게도 우리는 벌써 한다.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교육을 한다. 온라인교육을 떠올려 보면 되겠다. 하지만 학교교육에서 학생은 어떻게 자기가 원하는 교육을 할까? 학교교육은 시간표대로 학생을 가르치는데. 하지만 학생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수업을 조용히 거부한다. 딴 생각을 하거나, 딴 짓을 한다. 아니면 아예 잔다. 이렇게 학생은 여러 모로 자기가 원하는 교육을 한다. 학교에 가기 싫은 학생은 학교에 다니지 않거나, 다른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아직 어렵긴 하지만.

당신은 그래도 나의 주장을 반박할, 결정적 증거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시간, 장소, 방법, 목적은 학생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교육내용을 학생은 결정할 수 없다. 학생이 학교에 다닌다면, 학교교과과정에 맞게 배워야 한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학생도 대체로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을 공부한다. 따라서 아직 학생은 교육내용을 결정할 수 없다. 좋은 지적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두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 =>

ㄱ) 선택할 수 있는 내용이 다양하다.

ㄴ)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가?

치 과에 갔더니 의사가 매우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이빨을 땜질해야 할 상황이었다. 의사는 두 가지 재료가 있다고 말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값싼 재료가 있다. 하지만 이 재료는 오래가지 않으며, 입에서 용해될 때 건강에 해롭다. 반면 비싼 재료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가고 건강에도 해롭지 않다. 어느 것을 선택하겠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비싼 재료를 선택했다. 이상한 선택이다? 일단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있다. 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찜찜하다.

왜 내가 하고 싶은 교육내용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을까? 바로 두 가지 요소를 다른 사람?이 장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사교육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이미 정해졌으니까. 즉, 나는 사교육을 안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평범하고, 건전하게,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따졌을 때, 나는 결국 사교육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닐까?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 나는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이미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