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디어 존

생각만들기 2010/03/14 08:01 lacan
1. 첫 눈에 반하다.

교회 지체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배우자 이야기가 나왔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기혼자였다. 한 명이 대뜸 이렇게 외쳤다. "눈을 확 낮춰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소 심술이 돋은 나는 그에게 물어봤다. "그럼. 본인은 눈을 낮춰 결혼을 했나요?" 그의 목소리를 단호했다. "그럼요"

누가 누구에게 눈을 낮췄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눈을 낮춰야 한다는 조언에 동의한다. 단지 눈을 낮추는 것도 때로 교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 내가 너를 받아줄께. 그만큰 난 마음을 비웠어. 내가 상대보다 더 관대하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눈을 얼마나 낮춰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 연인도 있다. 첫 눈에 반하는 연인들. 이 남자, 이 여자라는 확신이 십계명이 돌판에 새겨지듯 마음에 새겨진다고 하니. 아마 눈높이를 따지는 사람에게 이런 얘기는 천국 얘기처럼 들리겠다. 하지만 내가 체험하지 못했다고 감히 없다고 말할 수 있나. 첫 눈에 반하는 연인은 지금도 있다. 이 사람이 곧 내 사람이란 확신이 번개처럼 내려치는 연인도 분명 있다.


2. 그들도 고통을 통과해야.

영화 주인공은 2주 만나고 평생을 약속한다. 좋다. 첫 눈에 반한 연인의 비밀을 연애 하수가 어떻게 이해하리요. 그냥 받아들여야지. 이들에게 2주는 평생을 약속하는 시간이 된다. 예수를 믿는데 몇 초도 안되니 2주도 어쩌면 짧은 시간은 아니겠다. 하지만 이들이 한 약속은 뜻밖의 사건으로 흔들린다. 9/11이 터지고, 새로운 연인이 등장하고... 이런 사정으로 연인들은 결국 이별하고 만다. 여기까지 너무 뻔하다. 미칠듯이 사랑했지만, 상황이 바뀌니까 마음도 갈라서더라. 입대 전에 연애한 남자는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갈라선 이유는 예사롭지 않다. 서로를 향한 응시가 변질되어 결심이 틀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각 자의 삶에 너무 진지했기에 결심이 틀어져버렸다. 이들은 주변 사람을 너무 사랑했기에 결심을 밀고 나가지 못했다.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식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의 운명을 사고로 봐야 할까?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했다.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단지 상황이 이들을 방해하여 이들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물론 상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자 주인공을 마음을 흔든 연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9/11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아마 이들은 행복하게 다시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방해한 상황은 더 중요한 비밀을 감춘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아무런 사건도 터지지 않고 이들이 다시 만나 결혼했다면 과연 잘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순조롭게 결혼했더라도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첫 눈에 반한 사랑에도 어려움이 있다. 사랑은 고통을 만든다. 두 사람을 미친듯이 하나로 묶어놓은 사랑이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는 폭탄이 될 수 있다. 사랑의 깊이를 들여다 본 사람은 아마 알 것이다. 차라리 이들이 첫 눈에 반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에게 외부 충격이 없었더라도 그들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외부 충격으로 그들이 겪은 고통은 사실 앞으로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었다. 그들은 마치 연습하듯 미리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영화 결말은 좋다. 그들은 외부 충격을 결국 이겨냈다. 외부충격으로 그들이 겪은 고통은 사랑에서 나오는 고통과 같다. 한 사람은 상대방의 배신에 분노하고, 다른 사람은 상대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한 사람에게 이미 배우자가 있지만, 여전히 첫 연인을 잊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연인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전쟁터에서 소비한다. 목숨을 담보로.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이겨낸다.


3. 사랑의 이데아

주인공들은 다시 만난다. 일단 좋은 결말이다. 사랑이 완성되려면 분명 다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세상 일은 모른다. 주인공들이 고통을 겪으며 참된 사랑을 깨달았다 해도 다시 만나서 사랑을 나눌지 모른다. 한번 헤어진 연인을 보면 다시 만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지만 너무 늦은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완전한 결말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조건 성공하고 볼 일인가? 혹시 연인도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닐까? 연인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참된 사랑에 조금씩 다가간다면, 비록 연인관계가 유지되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겠다. 인인관계의 실패와 성공은 사랑의 모든 것이 아니니까. 정말 어려운 일은 깨달음 다음에 오는 것 같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고통을 통과하면서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깨닫고 나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이 사람을,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주인공은 옛 여인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준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줬지만, 그 연인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해보자. 과연 그는 다른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것이 정말 어렵다. 우리는 사랑의 깊이를 경험한다. 그러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은 종종 사랑을 아예 잃어버리기도 한다. 부활절은 좋은 예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사랑했지만, 예수를 배반하고 말았다. 부활 후 예수는 다시 베드로를 찾아온다. 당연히 이 만남은 껄끄럽고 심드렁하다. 베드로는 이미 회개했다. 예수를 배반한 것을. 하지만 배신하고 회개한 후 다시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을까? 요한복음은 답을 하지 않고 끝나버린다. 아마 실망하고 실족하지 않고 사랑을 반복하면서 참된 사랑으로 나갈 때, 참된 사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반복은 사랑의 허무주의와 다르다. 사랑의 반복은 참된 사랑으로 나가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

섹스온더카우치(6)

강의록 2010/03/09 23:49 lacan
페니스와 팔루스 : 무엇이 다를까?

페니스의 어원을 따져보자. 그리스어를 찾아보면 페니스의 뜻은 대체로 꼬리라고 한다. 페니스는 정말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면 팔루스는 다르다. 팔루스도 페니스를 가리킨다. 하지만 팔루스에 다른 뜻도 있다. 팔루스는 두드러진 것, 돋보이는 것을 뜻한다. 팔루스는 발기에 가깝다. 발기한 성기는 확실히 돋보인다. ㅎㅎ 따라서 팔루스를 찾는다/얻는다고 할 때, 확실히 어떤 것이 자극한다.

남자와 여자가 팔루스를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여자는 권력있는 남자와 함께 있다. 재미있게도 예쁘고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재벌과 함께 있는 설정/구도는 영화나 연속극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능력도 없고, 못생긴 남자와 예쁘고 젊은 여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연인은 영화나 연속극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런 연인은 드문 것 같다.

여자에게 능력있고 멋있는 남자가(능력에 반드시 경제력이 포함된다.) 팔루스라면, 남자에게 소유물이 팔루스이다. 여자에게 그런 남자와 어울리는 것, 그런 남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남자는 자동차와 부동산, 여자를 소유물처럼 가지려 한다. 남자에게 이런 것이 팔루스이다. 하지만 남자가 이렇게 생각한다. 남자가 그런 팔루스를 가지고 있어야 여자에게 사랑을 받는다. 이렇게 본다면, 여자가 원하는 것이 팔루스이지만 남자는 자동차, 부동산, 경제력, 명성을 지녀야만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동차, 부동산, 재력... 이런 것은 팔루스의 상징이다.

여자가 나쁜 남자에게 끌린다는 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쁜 짓/태도에 끌린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나쁘다는 말은 남자가 가진 독특한 능력을 뜻한다. 모든 남자가 강력한 재력과 명성을 가지나? 그렇지 않다. 그래도 많은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여 결혼한다. 결혼한 남자는 적어도 배우자를 유혹할만한 팔루스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가지지만 여자는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여자에게 "보여지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남자는 여자의 이런 특징을 견디기 힘들다. 여자가 나타날 때, 여자는 애인에게도 나타나지만 다른 남자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애인이 굉장한 미인이라고 해보자. 애인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예쁘게 단장을 했다. 애인은 분명 남자를 위해 단장을 했지만, 다른 남자도 결국 애인을 본다. 팔루스를 주로 "가진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다른 남자가 애인을 보면 조금 불편해진다. 그래서 남자는 되도록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한다. 도저히 다른 남자가 애인을 넘보지 못하도록. 재벌의 애인을 누가 넘보겠는가? 재벌만큼 강력하지 않다면..




성공의 기준(2)

생각만들기 2010/03/08 00:10 lacan
이제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얘기요!

일단 대안이 아닌 것부터 한번 따져보자.

ㄱ) 우리는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추구는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당신이 행복하게 놔두지 않는다. 당신이 정말 행복을 얻었더라도 당신을 기어이 불행하게 만든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는 행복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ㄴ)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

요즘 유행하는 지침이다. 이것부터 분명히 하자. 욕망을 정말 포기하지 않을 수 있나? 그렇다. 당신은 욕망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다. 욕망을 고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 지침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 않다. 당신은 욕망을 고수할 수 있다. 정말 요점은 다른 곳에 있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 이것은 다소 허망하다. 이 주장은 대체로 칸트의 윤리학을 따른다.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다. 당신이 무엇을 욕망하는가?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취미생활을 포기하지 않을거야!! 이런 욕망? 재미있게도 바디우는 충실성을 따지면서 정치, 사랑, 과학을 지적한다. 왜 취미생활이 아니라 과학일까? 지젝의 말처럼 이 지침을 따르면 새로운 "기회"가 생기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새로운 생활터전까지 마련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사회가 정립되어야 하는데, 그냥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기회만 제공하는 것 같다. 그 후에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 못한다. 정말 제대로 된 지침이라면 새로운 사회, 새로운 공동체까지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지침은 개인의 고독한 투쟁으로 끝나버리기 쉽다.


ㄷ)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남에게 도움이 될 때,
ㄹ)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남이 나를 인정할 때,

ㅁ) 남이 무슨 일을 하든 나에게 도움이 될 때,
ㅂ) 남이 무슨 일을 하든 내가 남을 인정할 때,

위 4 주장이 상당히 중요하다. 먼저 도움과 인정이 같이 가야 한다. 남이 나에게 도움을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런데 도움만으로 부족하다. 내가 남을 인정해야 한다. 남이 나를 도운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남은 아마 실망할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이란 구절이 상당히 중요하다. 당연히 내가 남에게 해를 입혀선 안된다. 이 조건 아래서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남이 도움을 받고 남이 나를 인정도 한다고 생각해보라. 이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이런 사회에서 아마 사람들이 직업 종류에 지금처럼 목을 매달지 않을 것이다. 직업종류는 사실 인정욕구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청소부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자신이 청소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일하는 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 하지만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지든 남이 당신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직업종류 때문에 맘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