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이는 새벽 3시까지 인터넷을 하면서 놀 때가 많다. 그러면서 그 시간에 공부를 못하는 걸 두고 초조해한다. 공부가 중요하다고 보는 엄마 눈에 만날 놀기만 하는 애로 비칠까 봐 걱정이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하려고 들면 자신의 행복이 방해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진다." 119쪽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
"학원 갈 때 팀을 꾸린다고 했는데, 그 팀은 누가 짜는 거예요? 어머니들끼리 한 거죠. 아는 분들끼리.
처음부터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한게 아니라? 그렇게도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애들이 공부를 안 하게 돼요. 서로 친하니까 한 명이 잘한다 싶으면 야 쟤 좀 내버려둬, 저 혼자 공부하게, 그래요. 다 같이 떨어지면 우리 좀 쉬었다 하자,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에 한 팀을 열두명으로 꾸렸는데, 한 명 정도만 친구고 나머지는 처음 보는 애들이었어요. 부모님들이 일부러 환경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아요. 서로 모르는 애들끼리 경쟁시키려고. (137-138쪽,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 동녁)
=> 일단 민정이의 말이 한국교육의 궁지를 정확하게 꼬집었다. 한국교육은 어떤 궁지에 빠져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일단 기본 환상을 잘 깨달아야한다. 우리는 한국교육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교육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내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상황이 나를 전혀 다른 곳으로 내몬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정말 한국교육이 그렇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나는 이렇게 지적하고 싶다. 우리는 현재 한국교육을 원한다. 우리가 마지못해 이렇게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이런 현실을 원하며, 이런 교육게임을 즐긴다. 특히 부모가 그렇다. 부모는 과도한 경쟁에 아이가 희생된다고 아우성이지만, 사실 과도한 경쟁에 아이를 내보고 싶어한다. 그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냐... 예를 들어 리얼리티 쇼는 매우 가혹하게 보인다. 심지어 그것을 시청하는 우리도 리얼리티 쇼가 지나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우리는 리얼리티 쇼를 계속 보고 싶어한다.
ㄱ) 우리가 원해서 이런 교육게임을 한다면, 왜 우리는 그렇게 교육게임을 비판하고, 잘못이라고 아우성인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서 대기업 인사담당자를 설문조사했다. 지방대 출신이 과연 수도권 대학출신보다 실력이 모자랄까? 담당자들은 대체로 실력을 인정했다. 지방대 출신의 실력이 정말 모자라지 않다. 단지 국제 감각? 세계화 감각이 떨어진다고 할까? 아무래도 서울이 아니라 지방에 있다보니 그런 같다. 이런 대답이 많았다. 재미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지역감정의 요점은 사실에서 생기지 않는다. 지역감정은 무엇보다 "감"이다.
지방사람은 고루하고 보수적이다. 심지어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에게도 이런 평가가 따라다닌다. 그렇다면 이렇게 판단한 사람이 색다른 지방 사람을 만났다고 해보자. 그는 지방출신이지만 무척 세련되고 진보적이다. 정말 괜찮다!! 서울사람이 봐도. 그러면 그는 이제 생각을 바꿀까? 지방사람은 고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네. 지방사람은 고루하지 않은 모양이야... 이렇게 생각이 바뀔까? 그렇지 않다. 세련된 지방사람은 예외이다. 지방사람은 여전히 고루하다. 단지 그렇지 않은 몇 명만 있을 뿐.
지역감정이 지역사람의 것?일까? 대구지역 사람은 대구지역감정을 가지고 광주사람은 광주지역감정을 가진다? 하지만 지역감정을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대구사람이 대구사람을 고루하다고 비판할까? 물론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봐야 한다. 지역출신이지만 수도권이나 서울에 자리를 잡은 사람도 꽤 많다. 대구지역에서 대학을 나와 경기도에서 자리를 잡은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교육 문제를 논하게 되었다. 그 분은 공기업에서 일하므로 아마 앞으로 계속 경기도에 거주할 것 같았다. 굳이 대구에 내려올 이유는 없으니까. 그 분은 아이 교육을 위해 경기도가 좋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에게 경기도에서 교육을 받으면 서울에 쉽게 진출하겠지요. 지역출신보다.
그래도 이 분은 양반이다. 서울에 자리잡은 지역출신 가운데 과거를 매우 강하게 부정하시는 분도 있다. 어릴 적 지역에 잠시 거주했다. 하지만 서울에 와서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지역정서를 강하게 비판하며, 나름대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지역감정의 근원을 다시 "검토"하고 싶어진다. 각 지역에 고유한 지역정서는 일단 놔두자. 그것은 서울에도 있다. 반면 지역감정은 재미있게도 지역에 어떤 부정적 감정을 배치한다. 그렇지만, 서울에 특별히 "좋은 감정"을 배치하지는 않는다. 단지 지역에 부정적 감정을 배치하면, 서울에 "은밀히" 긍정적 감정이 쏠린다. 이것은 은밀한 효과이다. 예를 들어 지역사람이 그렇다고 해서 서울 사람은 안 그러냐? 이렇게 묻는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서울사람도 그렇지 하고 답한다. 하지만 여기에 늘 "드러나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 "그래도 지역사람보다는 서울사람이 덜하지"
뉴욕과 텍사스주를 한번 비교해보자. 당신이 뉴욕과 텍사스를 잘 몰라도 좋다. 두 곳 가운데 다문화주의가 성행하는 곳은 어디일까? 뉴욕일까? 텍사스주일까? 아마 당신은 뉴욕을 고를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과 다른 광역시 가운데 어느 곳이 다문화적?일까? 서울일까? 다른 광역시일까? 아마 당신은 서울이라고 답하고 싶을 것이다. 다문화주의라는 말이 어디서 더 성행할까? 이렇게 물으면 더욱 서울이라고 답할 것이다. 지역차이는 중심부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지역감정이란 서울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어쩌면 서울이 낳은 자녀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역에도 서울을 보는 삐딱한 눈이 있지 않나? 서울 녀석은 모두 새침떼기지.. 이런 편견. 그렇다. 있긴 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묘한 비대칭이 있다. 서울에서 서울과 지방을 비교할 때, 대체로 지방은 서울을 능가하지 못한다. 지방에 아무래도 부정적 감정이 더 실린다. 반면 지방에서 서울과 지방을 비교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서울을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서울이 지방을 얼마든지 능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이 끝날 때 따라붙는 수식어 "그래도 서울이 낫지 않을까요..." 지방사람이 자주 이렇게 말한다. 이런 비대칭이 지역에서 만들어졌을까?
어떤 사람은 지역감정을 균형으로 풀고자 한다. 지역균형발전이 대표적 예가 되겠다. 하지만 그는 앞서 내가 지적한 "감의 문제", "비대칭"의 문제를 너무 가볍게 지나친다. 그래서 실패하고 만다. 지방이 서울에 비해 부족하니 지방을 지원해서 차이를 조금이라도 줄이자. 이런 생각은 벌써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메시지를. 그래서 서울사람은 매우 여유를 부리며 이렇게 예언한다. 지역균형발전을 결국 실패할 것이다. 지역이 서울을 "따라잡고자" 할수록 서울은 점점 "따라잡을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 그래서 따라잡고자 하는 사람은 제 풀에 지칠 것이다. 이 예언은 분명 일리가 있다. 지역감정은 소수자 역설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소수자에 속한다고 해보자. 그가 스스로 나는 소수자이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당장 맞장구를 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니, 내 생각이 맞구먼" 반대로, 나는 소수자가 아니다 라고 그가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할 것이다. "그가 부인하는 것을 보니 그는 정말 소수자이구먼" 예를 들어 지방사람은 고루하고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있다. 내가 그것을 인정하면, 나는 정말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이 된다. 더구나 나는 지방사람이니까. 내가 그것을 부정해도 사람들은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애써 "부정"하고 있으니까. 나는 결국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
이야기를 이해하면, 한국교육열도 쉽게 간파한다. 이것이 내 주장이다. 한국사람이 왜 그렇게 교육에 열을 올리나? 보통 이 질문을 해결하고자 교육기능을 자주 지적한다. 한국에서 교육제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 교육을 안하면 크게 손해본다. 그래서 한국사람이 그렇게 교육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물론 이런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개인행동을 강제하는 객관적 조건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교육열을 제대로 파헤치지 못한다. 자신이 노후 자금까지 끌어다 자식 교육에 쏟아붇는 부모를 보자. 과연 그들이 객관적 조건 때문에 그렇게 할까? 따라서 객관적 조건과 함께 다른 요소가 있다고 봐야 한다.
ㄱ) 교육은 개인에게 이야기를 제공하고, 이야기를 직접 실행하도록 기회를 준다.
ㄴ) 변신과 분신(욕망)이 이야기에 참여하도록 부추긴다.
ㄴ)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온라인 게임을 살펴보자. 역시 온라인 게임의 묘미는 아바타이다. 나의 분신이 게임속에 있다. 그리고 아바타가 수행할 역할이 있으며, 아바타가 참여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게임이 그렇게 인기가 있다. 이 논리는 엄마 교육열에 대입해보자. 엄마의 분신은 누구일까? 자식이다. 그리고 자식이 참여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학교제도이다. 일단 나의 주장을 전제하면, 당장 이런 문제가 생긴다. 현재 한국교육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학부모도 교육이라면 진저리를 친다. 학생은 학교교육에 흥미를 잃은지 오래됐다. 교육 이야기가 그만큼 재미없어졌다. 그렇다면 학부모나 학생이나 교육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그렇게 재미없는 게임을 왜 그렇게 오래 붙들고 있나?
ㄷ) 이야기의 주인공은 역경을 넘는다. 어려움을 뚫고 나간다.
교육이 이야기를 제공한다면, 이야기에는 ㄷ) 과 같은 요소가 들어있을 것이다. 명문대 진학수기를 한번 읽어보자. 여기에 주인공이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는지 잘 나와 있다.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세세하게 기술한다. 이것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가 명문대에 들어갈만하다고 생각한다. 노력은 좋은 결과를 예상하게 만드니까. 주인공이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내용은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교육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곧바로 교육을 그만두지 않는다. 요점은 역시 교육 이야기의 전개이다. 교육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나?
ㄹ)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제시한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르게 교육할 수 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이 기존교육에 남아있다. 입학 - 시험 - 졸업 - 진학이란 기존교육 이야기는 매우 진부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만큼 마음을 끌어당기는 이야기가 있나?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기존교육에 속해있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나? 이런 사람도 역시 드물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기존교육에 남아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최
근 엄마의 마음을 꼬집는 말이 많다. 엄마가 아이를 너무 쥐어짠다.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의 삶을 쥐고 흔들려
한다. 엄마도 자기 삶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아이를 덜 괴롭힌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나의 과거가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초등학교 시절은 엄마는 집에 잘 없었다. 나는 내가 점심을 알아서 챙겨 먹었다. 아빠? 빗자루로 맞았다. 다행히 빗자루가 나무가
아니어서 다행. 그렇다고 요즘 이야기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바뀌니까. 과거에 왜 그렇게 엄마,
아빠의 권위가 그렇게 셌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엄마가 그렇게 나를 챙기지 않아서 불만을 품을 만도 한데, 나는 한번도 불만을
표현하지 못했다. 아예 불만을 품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과거에 아웃소싱을 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엄마가 지식이
없어서 아이를 가르치지 못하면, 아이를 가르칠 사람을 고용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보다 과거에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지금은 더 쉬워졌다. 심지어 돈이 많으면 아예 아이를 돌볼 사람도 고용할 수 있다.
아
이를 존중하거나, 아이의 말을 차근차근 들어주자? 이런 일이 너무 힘들다면,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고용하자. 그렇지 않나?
여기서 반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아이가 볼 때, 엄마나 아빠가 너무 생뚱맞다. 도저히 말이 안통한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잘 들어주는 부모를 고용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불가능할까? 아마도 벌써 그런 일을 벌어지는 것 같다. 아이는 엄마, 아빠를
대신할 인물을 이미 선택/고용? 한다. 그리고 진짜 엄마에게 비위만 맞춰진다. 엄마와 싸우면 자신만 손해니까. 요즘 부모는
이렇게 엄마-대용품과 경쟁한다. 참.. 엄마노릇 어렵게 됐다.
짖
굳은 상상 하나 더. 아이를 존중하라. 아이의 말을 잘 듣는 엄마가 되자. 이런 이야기가 아이에게 어떻게 들릴까? 아이는 엄마의
욕망이 정확히 어디있는지 알까? 사실 알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이 두 명을 상상해보자. 한 아이는 학교성적이 너무나 탁월하여,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학할 수 있다. 하지만 부모와 으르렁거린다. 반면 다른 아이는 부모와 '친구?'처럼 지내지만,
학교성적은 걱정스러운 정도다. 당신의 아이는 어느 쪽에 속했으면 좋겠나? 두 쪽 모두 선택하지 않겠다. 이렇게 답하고 싶은 분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전해보겠다. 당신이 어떤 엄마가 되든, 아이 교육에 큰 영향을 없을 것이다. 이 주장이
맞다면, 정말 기분이 영 안 좋아진다. 내가 멋진 엄마가 되어서 아이와 잘 지낸다면, 일단 그것으로 좋다. 하지만 교육문제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강심장 엄마는 아예 정책을 바꿔 아이를 들들 볶으려 할지 모른다. 결국 내가 어떤 엄마가 되든 아이 교육에
큰 상관이 없다면, 내가 악역을 맡고 아이가 성공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이런 유혹이 생길지 누가 알겠나.
2. 자식, 나의 에반게리온
엄
마의 교육열을 이해하는 열쇠는 분신과 변신이다. 아주 유용한 예가 있다. 일본 만화 가운데 에반게리온이란 만화가 있다. 최근
극장에서 개봉하기도 했다. 에반게리온의 큰 틀은 마징가 제트와 같다. 미지의 괴물이 우리편을 침공하고 주인공은 에반게리온이란
로봇을 타고 괴물을 물리친다. 그런데 에반게리온(에바)에게 마징가와 다른 특징이 있다. 주인공이 에바에 타면, 주인공은 에바와
합체된다. 그래서 에바의 팔을 때리면, 주인공도 고통을 느낀다. 아베는 주인공의 분신이다. 또한 아베는 변신욕망에 잘 부응한다.
내가 거대한 로봇과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정말 신나지 않을까? 주인공이 에바에 타는 순간 주인공은 변신한다고 느낄
것이다.
자
식이 엄마의 분신(아바타)라면 어떻게 될까? 자식은 엄마의 분신이다. 자식은 엄마의 요구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엄마의 요구를 이루려 한다. 엄마가 그렇게 교육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사실 아이가 온라인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분신(아바타)이 있는 온라인 게임은 정말 중독성이 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손을 놓지 못한다. 그런데 엄마도 아이처럼
교육에서 손을 놓지 못한다. 적어도 자식이 분신(아바타)라면. 이 비유가 귀에 거슬릴 것이다. "내 아이를 분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너무 비인간적인 생각 아닙니까? " 요점은 꼭두각시가 아니라 분신이다. 또한 변신이기도
하다 . 엄마는 아이를 통해 변신하니까. 또 다른 삶을 사니까.
하지만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한다. 분신과 변신만 있어서 엄마 교육열을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이란 게임이 있어야 한다. 나의
분신이 나의 요구대로 참여하는 게임이 있어야 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교육이 바로 그 게임이다. 온라인 아바타 놀이를
수십만이 즐긴다면, 교육 아바타 놀이는 도대체 몇 명이 즐기나? (전국민?) 그런데 참 수상한 문제가 있다. 우리가 교육 아바타
놀이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놀이가 별로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부모이든 교육에 대해 한 마디 한다.
교육이 그렇게 재미없는 게임이라면, 벌써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을 텐데 왜 아직까지 우리는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 할까? 내
비유가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므로 이런 문제가 생겼다.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비유를 포기하기보다 답을 한번
찾아보자. 게임의 진짜 매력은 이야기에 있는 것 같다. 온라인 게임을 하더라도 늘 즐겁지 않다. 매우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게임을 당장 그만두지 않는다. 아바타 게임에는 이야기가 있다. 나의 분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이야기.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교육에도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교육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은밀한 이야기. 당신이 아이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아이를 잠시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보자. 당신에게 그런
이야기가 있나?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지시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나?
똥 : 인간과 동물을 똥을 어떻게 대할까? 여기서 인간이 동물과 상당히 다르다. (물론 인간도 동물이긴 하지만) 무엇이 다를까? 인간은 똥을 가지고 논다. => 아이가 처음부터 똥을 싫어할까? 그렇지 않다. 그런데 똥은 그저 똥이 아니라 상징이다. 이 점이 동물과 가장 다른 점이다. 똥이 더럽다. 똥을 피해야 한다. 이런 뜻을 누가 말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엄마다. 반대로 아이에게 똥은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 될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똥을 최초 상징으로 본다. 심지어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상징이다. => 왜? ( 다음 시간에 계속)
대구에 새로 들어온 CGV 하지만 집에서 멀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오늘 아침 우연히 개봉영화를 검색하다 좋은 영화를 발견했다. 오호라... 다른 극장에서 아예 하지 않는 영화가 CGV에서 하네. 그것도 보고 싶던 영화로.
요즘 영화관 가기 정말 겁난다. 거금 8000원을 들여 CGV로 갔다. 새로 지은지 약 1년. 일단 겉모양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일반 극장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영화를 보러 들어가니..
일단 의자가 매우 훌륭했다. 그리고 의자 사이 간격도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이럴 수가... 영화관이 이렇게 진화했단 말이냐. 정말 집에서 가까웠으면 자주 가고 싶을만큼. 허나.. 드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상영시간 30분을 남겨두고 영화가 갑자기 중지해버렸다.
10분을 기다려도 복구가 안되자, 직원이 와서 환불해드리겠다고 했다. 우후훗.. 비록 결말을 보지 못했지만, 8000원을 되돌려 받았다. 이 돈으로 점심을.. 일단 CGV가 확실히 돈을 많이 쏟아 붇긴 했다. 다른 상영관에서 하지 않는 영화도 3편씩이나 하고. 특히 의자와 의자 사이 간격은 수십년만에 느끼는 문화 충격. => 이런 변화는 매우 "작지만" 정작 이것을 실천한 극장주는 없었다. 그만큼 사소한 변화!도 힘들다.
교
육관련서적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교육을 제대로 합시다. 2)교육을 잘 합시다. 1)은 설명 안해도 알 것이다.
올바른 교육을 하자는 뜻이다. 교육을 고치자... 2)번은 교육의 성공을 추구한다. 공부 잘 하는 법. 나는 이렇게 합격했다.
그런데 이런 책을 쓰는 저자는 누구를 겨냥할까? 학생? 교육 당사자가 학생이므로 학생이 교육에 관심있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라면
잘 알 것이다. 아이가 이런 책을 읽는가? 대체로 읽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을 사서 읽다니! 만화책 사는 것도 주저하는데.
오히려 엄마가 교육서적을 읽는다. 솔직히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엄마가 학교가서 공부하는 것은 아닌데. 하여간 엄마는 교육에
민감하다. 눈과 귀가 빠르게 움직인다.
2. 나, 명문대 엄마야.
엄
마도 다양하다. 어떤 엄마가 교육관련책을 많이 읽을 것 같은가? 여기서 고루하고, 혐오스런 구별을 한번 해보겠다. 우리 어른은
아이들을 쉽게 학교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공부 잘해서 명문대 갈 녀석, 공부 못해서 지방대 갈 녀석. 좋다. 어른이 아이를
이렇게 구분한다면, 똑같은 기준을 어른에게 들이대보자. 명문대출신 엄마, 지방대출신 엄마. 우습게도 이런 구분은 사실에 근거한
구분이다. 그렇지 않나? 그런데 지방대 엄마가 명문대 엄마보다 더 많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구분하고 보니 사회적
실험을 하고 싶어진다. 이런 실험은 어떨까?
많
은 엄마가 명문대에 집착한다. 굳이 명문대에 가야 하나? 그런데 어떤 엄마가 명문대에 집착할까? 명문대 엄마일까? 지방대
엄마일까? 요점은 두 종류의 엄마가 서로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명문대 엄마는 지방대를 모른다. 지방대 엄마도 명문대를 모른다.
또한 명문대 효과와 지방대 효과도 똑같다. 지방대 엄마가 명문대 효과를 잘 알까? 반면 명문대 엄마가 지방대 효과를 알까?
명문대 효과는 사실 지방대 엄마에게 (현실이 아니라) 가상에 가깝다. 정말 명문대 효과를 느껴본 지방대 엄마가 있나? '난
알아요' 라고 소리치는 분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소문이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지 자기 경험은
거의 없다. 또한 지방에 거주하는 지방대 엄마의 경우, 솔직히 말해 명문대에 거의 상관없이 산다. 명문대가 특별히 자기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명
문대 엄마는 어떨까? 명문대 엄마가 지방대를 안다면... 한국에서 명문대는 오직 서울에 있다. 더구나 서울거주 명문대 엄마는
지방에 올 일도 없다. 그런 엄마가 어떻게 지방대를 알겠다. 어떤 모호한 환상이나 소문만 무성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실험은 간단하다. 명문대 엄마와 지방대 엄마가 만나 편견과 오해를 풀어보자. 명문대 엄마는 명문대 환상을 지적할 수
있다. 본인이 명문대를 다녔으니. 지방대 엄마도 지방대 환상을 풀어줄 수 있다. 당연히 당사자니까. 이렇게 두 부류의 엄마가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 적어도 명문대 집착증은 많이 해소될 것이다. 그렇지 않나? 명문대 엄마가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명문대 다녀봐도 뾰족한 수는 없더라고요'
3. 화성인 바이러스
여
기까지 읽은 분은 나에게 묻고 싶을 것이다. '이런 실험이 성공할까요?' 실험에 특별한 흠은 없다. 오히려 실험을 망치는 무엇이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비슷하게 예상할 것이다. 실험의 의도는 좋으나 실험 결과는 끔찍하겠지! 앞에 문장을 다시
인용해보겠다. '명문대 다녀봐도 뾰족한 수는 없더라고요' 명문대 엄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겠나? 반대로 지방대
엄마가 지방대도 다닐만 하더라고 했다면, 또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이런 대화가 공적 대화로 방송되었다면, 우리는 결과를 짐작할
수 있다. 명문대 엄마는 거만하고 지방대 엄마는 불쌍하다? 당장 이렇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이런 정서가 이미 공적 대화를 망칠지
모른다. 문제는 역시 똑같다. 각 사람의 표현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대화를 망치게 하는 어떤 정서.
여기
흥미로운 예가 하나 있다. tvN 의 <화성인 바이러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뚱뚱한 여자가 출연자로 나왔다. 그는
당당하게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이어트를 그만 뒀다. 그리고 지금 모습 그대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사람의
눈초리에 신경쓰지 않고 보통 여자처럼 산다고. 그러자 사회자들이 묘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당당하게 사는 것은 좋지만, 그런
결심이 혹시 다이어트 실패에 대한 역반응이 아니냐.. 다이어트를 계속 하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지 않느냐? 남자친구가 정말 지금
모습을 좋아하겠느냐... 출연자의 결심을 결정적으로 흔들어놓을 손님까지 동원되었다. 손님은 출연자처럼 뚱뚱했지만, 결국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연하남에게 프로포즈도 받아 봤다고. 결국 출연자는 결심을 조금 유보하는 것으로 한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물
론 비만이므로 나중에 다이어트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출연자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요점은 출연자의 결심이 아주 '체계적으로' 오해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이미 해봤는데 실패했으니까 그런
결심을 한거지.. 실패를 그렇게 정당화해서 되겠나... 주변 사람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결심이 본인에게 도움이
되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분을 한번 상상해보자. 나는 앞에서 사회적 실험을 제안했다. 그런데 정작 명문대/지방대라는
구분에 집착하는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닌가! 이렇게 나를 비판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거기에 집착하고 사나? 그런
구분도 알고보면 허구인데. 그냥 자기 소신대로 교육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소신껏 공부하고 대학 가시오! 나에게 이렇게 주문하는
분에게 나는 '체계적 오해'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왜! 소신껏 교육하면 되는데, 그것이 '사회적으로' 통하지 않을까?
Today, the defence of the family is seen as a rightwing cause. Conversely, liberal feminism is seen as a leftwing cause. But these associations are questionable.
In both cases, a liberal left unconcerned with notions of intrinsic good "conservatively" sanctifies existing tendencies. Thus Deborah Orr cites the fact that women, like men, were once made wage-slaves as if this were a good thing. She also cites the fact that today middle class women tend to have babies late as if this were a sign of the rise of freedom. Meanwhile she contends against David Cameron that "the days of the typical family are numbered".
But it is not the case that a mere fact can generate a value. While women have always worked, industrial capitalism pressured them into forms of work that interfered with their partly desired domestic roles. Campaigns for a male "living wage" were in consequence campaigns supported in the past both by the left and by women. If today the middle class have babies late, then that is more the result of competitive market pressures and the market promotion of youth culture than of any supposed liberation of "free choice". As to family decline, this occurs because an overbearing market and state deal directly with the individual, beginning at the youngest age possible. The family is being undermined for the same reason that unions, mutuals and churches have been undermined: because these are voluntary associations that combine self-help and education with a democratic sharing of resources.
The family is the one institution of primitive participatory community that still survives. It involves the equal sharing of goods. Authority within the family is not necessarily patriarchal and aims self-denyingly at reciprocity. In these ways the family offers uniquely a training in mutual nurture. Of course it is the worst source of pathologies, but only because it is the strongest source of psychic health.
Of course also, there can be "unconventional" families which should not be penalised. But all families aim for fidelity and stability, and this very aim favours a social and political bias towards marriage rather than cohabitation. For commitment in time requires more than an endless reserve as to what one may think tomorrow, which causes "partners" to face an intolerable continuously renewed judgement from each other. Marriage suspends sexual competition and distributes sexual partners equally. It still today usually protects women physically and compensates for their lesser muscular strength.
In the case of liberal feminism, the left has shied away from the fact that its success has coincided with a regressive era that has involved an increase in economic inequality and a decline of civil liberties while covertly compensating sexual liberties. The archetypal female subject today is in one way a male capitalist subject writ large, as it is seen as autonomous in relation to biological reproduction as well as economic production. At the same time it remains a traditional "female" subject defined by private concerns now become consumeristic.
The downside of this hybrid female subjectivity is the continued enslavement of women in both workplace and home and the loss of a male code of honour as to the assistance of women and children, which has had devastating consequences for the working class. All this combines with an increased state and market control of reproduction which amounts to a new general rule of men over women.
Instead of this we need a true radical feminism more focused on the question of what constitutes good relations between women and men. This needs to include mutual equity concerning procreation and above all equal rights to the combining of work and child nurture without economic loss. In cultural terms we need women to play a public role neither as subordinate, nor as men writ large.
Such a feminism would promote the family as the first school of association and of resistance to the depravations of both market and state.
"
어머니는 점을 보고 와서 저를 괴롭혔어요. 남편을 잘못 만났다나요. 당시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여 기가 죽었어요. 마음이 점점
가족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지요. 어떻게 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너무 힘들었어요. 낮이든, 밤이든 지옥이었어요. 불면증과
우울증이 저를 녹초로 만들어 버렸어요."
나는 자리에서 그를 올려다 봤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원고를 읽었다.
그는 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있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주부이다.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다. 결혼 전 그는 평범한
처녀였다. 그리고 평범하게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는 많은 고난을 겪었다.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여 방황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린 사람처럼 보였다. 결혼 전부터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편이 가정에서 멀어지자
어머니는 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점을 보고 오더니 남편의 흠을 후벼팠다. 어머니와 남편 사이에서 그는 완전히 뭉개졌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함께 온 것이다.
잠시 사실을 접어두자. 그는 지금 간증을 한다. 어머니나 남편을 데려와 정말
그의 말이 맞는지 따질 수 없다. 여기서 그가 어머니의 욕망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살펴보자. 그는 어머니의 기대를 지적한다.
어머니는 은근히 딸이 좋은 대학에 가기 바랬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평범한 지방대에 진학했다. 그것마저 어머니의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여기까지 어머니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같은 대학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하자 어머니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으니 좋은 대학출신 남자를 만나야 한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남자라니! 조금 과하게
해석하자면, 어머니는 딸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꿈을 무자비하게 짚밟은 대가로.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딸의 생각이다. 딸은 특히 학벌을 언급한다. 어머니는 특별히 학벌에 집착했다. 딸이 보기에
그렇다. 교육은 엄마의 욕망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엄마는 좋은 학벌을 원했다!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다. 따라서 딸은 좋은 학벌을
얻었다면, 엄마는 기뻐했을 것이다. 딸이 좋은 학벌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다면, 엄마는 만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교육을
이렇게 이해하면, 다소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좋은 학벌을 가지면, 엄마와 자식의 관계가 좋아질 것이다.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은 "그래서" 엄마와 사이가 좋을 것이다.
아마 이 구절을 읽은 독자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것
같다. 그냥 이상하다. 좋은 학벌을 얻으면 좋긴 하지만, 그걸 얻는다고 부모와 관계가 좋아질까? 그러면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은
부모와 사이가 좋아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이 주장은 이처럼 이상하고 뭔가 어긋나 있지만, 여전히 영향력/설득력이 있다.
통한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해보겠다. 어떤 아빠는 나와 이야기하면서 아들의 영재성을 걱정했다. 아들에게 영재성이
있다. 이런 저런 문제풀이를 해보니 깜짝놀랄만한 속도로 문제를 풀어냈다. 아빠는 아들의 능력에 놀라서 일단 영재교육을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아빠의 어깨는 무겁다. 현재 수입도 변변치 않고, 다른 아이도 있는지라 영재교육에 제대로
할 수 없다. 아직은 영재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돈을 많이 써야 하니까. 일단 아들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도 많이 사주기로
했다.
그런데 아빠는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빠는 과거를 끄집어냈다. 아빠는 자신에게도
영재성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아빠는 어릴 때 우연히 경시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얻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더 큰 대회에 나가야 하는데 아빠를 가르칠 교사가 없었다. 기존 교사는 한번도 대회를 준비해보지 못했다. 그러니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자신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아빠에게 경시대회 준비를 시킬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빠에게 문제집을
던져주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빠는 혼자 대회를 준비해야 했다. 아빠는 더 큰 대회로 계속 나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대회를
대비하여 준비한 학생과 경쟁해야 하니 아빠가 불리할 수 밖에. 아빠는 이 사건을 안타깝게 여겼다. 옆에서 지도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자신도 재능을 더 개발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
아빠의 고백을 과거에서 이해하면 아주 쉽다. 아들의 영재성까지 쉽게 해명할 수 있다.
ㄱ) 아빠는 과거의 상처가 있다. 아들도 그런 상처를 받기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들의 능력에 특히 신경쓴다.
나
는 이런 해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아빠의 과거는 날조되었을까? 아들의 현재 상황을 보면서
아빠의 과거가 새롭게 '탄생' 했다면? 황당한 가정은 아니다. 아들과 아빠를 비교해보면 금방 유사성을 읽을 수 있다. 아들이
영재성을 보이는 과목과 아빠가 잘했다는 과목은 같다. 또한 아들이 부닥친 상황과 아빠가 부닥친 상황도 비슷하다. 아들의 능력을
키우고 싶은데 경제적 형편이 안된다. 반면 과거에 아빠는 자신을 도와줄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 아빠는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아들의 문제를 접하는 순간, 아빠의 과거는 환상적으로 재구성된 것.
그렇다고 아빠가 과거를
통째로 날조했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 아빠가 말한 사건은 있었을 것이다. 요점은 왜 그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사건으로 부상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물어봐자는 뜻이다. 이처럼 교육은 인생문제를 이해하는/이야기하는 훌륭한 배경을 제시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느낀다면, 교육은 실패를 해명할 좋은 구실을 제공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느낀다면, 교육은 성공을 해명할
좋은 구실을 제공한다. 아빠는 아이를 보면서 자신을 이해하는데, 교육이 바로 아이와 아빠를 연결시킨다.
하지만
나는 바로 이런 이유로 교육이 족쇄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교육에 왜 그렇게 매달립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당장 대꾸하고 싶을
것이다. "교육이 중요하잖아요. 교육을 할 수 밖에 없잖아요" 여기서 우리는 이 말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교육이 사회적으로
중요하니까 한다. 그리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객관적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교육에 목을 매다는 것이 아니다. 앞서 내가
논의한 대로 말하자면, 교육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교육에 매달리는 것이다. 교육은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하면 문제를 풀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래서 교육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매력적이지 않지만,
도무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처럼 보인다.) 재미있게도 이제 이런 시대는 점점 막을 내린다. 10년, 20년 젊은 세대가 과연
우리처럼 그렇게 교육을 이야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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