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들기
2010/01/30 20:48
lacan
무
엇이 가장 좋은 교육인가요? 간단하고 훌륭한 답이 있다.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 학생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목적을 세워 하는 교육. 이런 교육이 가장 좋다. 그렇지 않나? 그런데 당신은 이런 교육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당신은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교육? 그런 교육은 당연히 좋다. 강조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교육을 그렇게 한다면, 그런 교육은 곧바로 실패할
것이다.
ㄱ)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을 할 수 있다. 단지 그런 환경이 되지 않았다. 환경을 잘 조성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교육할 수 있다.
ㄴ) 우리는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꿈꾼다. 하지만 꿈은 꿈이다.
ㄷ)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을 하면 당연히 좋다. 하지만 환경에 상관없이 그런 교육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의 소원을 어떻게 들어주나?
ㄹ) 우리는 이미 그런 교육을 한다. 우리가 의식을 못해서 그렇지.
ㅁ) 능력과 환경보다 교육의 뜻을 먼저 정해야 한다.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은 교육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교육에 맞지 않다.
**
가장 훌륭한 교육이 무엇입니까? 학생에게 물어보라. 아마 당신은 조금은 냉소적 답을 듣게 될 것이다. 한국 학생에게 이 질문이
곧 함정이다. 왜 가장 훌륭한 교육을 고심해야 할까? 정말 학생에게 선택할 권한을 준다면, 학생은 그냥 교육을 "하지 않기로"
결심할 것이다.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교육을 생각하는 짓은 쓸데없다.
너무
냉소적인가? 일단 가장 훌륭한 교육이 배우는 자가 원하는 교육이라고 해보자. 우리는 그런 교육을 할 수 없나? 재미있게도 우리는
벌써 한다.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교육을 한다. 온라인교육을 떠올려 보면 되겠다. 하지만 학교교육에서 학생은 어떻게 자기가
원하는 교육을 할까? 학교교육은 시간표대로 학생을 가르치는데. 하지만 학생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수업을 조용히 거부한다. 딴
생각을 하거나, 딴 짓을 한다. 아니면 아예 잔다. 이렇게 학생은 여러 모로 자기가 원하는 교육을 한다. 학교에 가기 싫은
학생은 학교에 다니지 않거나, 다른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아직 어렵긴 하지만.
당신은 그래도 나의 주장을
반박할, 결정적 증거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시간, 장소, 방법, 목적은 학생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교육내용을 학생은 결정할 수 없다. 학생이 학교에 다닌다면, 학교교과과정에 맞게 배워야 한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학생도 대체로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을 공부한다. 따라서 아직 학생은 교육내용을 결정할 수 없다. 좋은 지적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두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 =>
ㄱ) 선택할 수 있는 내용이 다양하다.
ㄴ)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가?
치
과에 갔더니 의사가 매우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이빨을 땜질해야 할 상황이었다. 의사는 두 가지 재료가 있다고 말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값싼 재료가 있다. 하지만 이 재료는 오래가지 않으며, 입에서 용해될 때 건강에 해롭다. 반면 비싼 재료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가고 건강에도 해롭지 않다. 어느 것을 선택하겠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비싼 재료를
선택했다. 이상한 선택이다? 일단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있다. 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찜찜하다.
왜 내가 하고 싶은 교육내용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을까? 바로 두 가지 요소를 다른 사람?이 장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사교육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이미 정해졌으니까. 즉, 나는 사교육을 안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평범하고, 건전하게,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따졌을 때, 나는 결국 사교육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닐까?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 나는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이미 정해졌다.
트랙백 주소 :: http://lacancenter.org/lacan/trackback/155
강의록
2010/01/28 08:46
lacan
지난번에 똥 얘기 하다 만 것 같은디..ㅎㅎ
1. 일단 상징과 상징이 나타내려는 것! 상징과 상징이 나타내려는 것에 미묘한 틈이 있습니다. => 기본 명제
2. 그런데 똥의 경우, 똥이 상징이라면, 똥이 나타내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신분석은 똥의 경우, 차이가 극대화된다고 지적합니다.
똥과 똥이 나타내려는 것의 차이는 무한대 => 다시 말해, 가장 미천한 것과 가장 고귀한 것이 똥에서 겹친다고 보면 됩니다.
3. 또한 똥에는 늘 단어를 넘어가는 무엇이 있습니다. => 실재 개념과 이어집니다. 똥이 왜 그렇게 상징으로 잘 작동하는지.. 그 이유는 똥은 단지 똥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죠.
4. 재미있게도 마틴 루터는 사탄과 싸움을 묘사할 때, 똥에 관련된 단어 (똥도 포함하여)를 사용합니다.
5.
또한 똥은 모호합니다. (양가성이라고 하지요. 정신분석에서) 똥은 나에게서 나왔지만,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요? 나에게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나의 소유물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똥에는 소유권/ 어떤 정체성 같은 것이 없습니다.
트랙백 주소 :: http://lacancenter.org/lacan/trackback/154
생각만들기
2010/01/20 16:48
lacan
종교를 어떻게 구분할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종교를 구분할 때 두 개 기준을 사용한다.
ㄱ) 확신
ㄴ) 종교의 내용
종교인은 확신을 가지며, 특정한 내용을 믿는다. 종교인이 아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런 생각은 쉽게 무너진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골프광을 생각해보자. 그에게도 확신이 있고, 어떤 특정한 내용을 믿는다. 하지만 골프를 좋아하는 것과 종교를 믿는 것은 분명 다르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ㄴ)을 고수하려고 한다. 비종교인은 그저 상식을 가지고 있지만, 종교인은 특별한 내용을 믿는다고.
ㄷ) 종교인은 상식과 다른 내용을 믿는다. 그렇게 유별난 내용을 믿는 사람은 아마 유별난 태도나 신념을 가질 것이다.
ㄷ)은 틀렸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종교의 내용이 유별나다. 그래서 믿기 어렵다? 그런데 오늘날 날로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많은 것이 유별나다. 지난주에 후배 부탁으로 보험설계사 설명회에 참석했다. 영광스럽게도? 나 한 명을 겨냥한 강의였다. 보험 업계는 나에게 낯설다. 하지만 지점장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럴듯 했다. 단지 내가 그 일을 할 것이냐?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 아마 30시간 교육을 받았다면, 내 생각이 많이 바뀔지 모른다. 역시 문제는 내용이 아니었다. 내가 익숙해질 수 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종교도 그렇다. 종교내용은 낯설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낯설지 않게 된다. 낯설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나에게 익숙해진다면, 내가 쉽게 받아들이도록 누군가 설명해준다면, 낯설다는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소된다. 또한 종교내용을 생각할 때, 우리가 쉽게 범하는 잘못이 있다. 종교인이 종교교리를 믿는다고 말할 때 비종교인은 당황한다. 어떻게 그렇게 황당한 내용을 믿을 수 있느냐? 하지만 종교인이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봤나? 재미있게도 기독교인도 비기독교인만큼 기적을 의심한다.
종교교리는 해석을 요구한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기적이 일어났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 그래서 기적을 믿는 종교인도 고심한다. 종교인이 교리를 대하는 태도와 비종교인이 교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를까?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 무엇이 진짜 종교문제인가? 특히 오늘날. 나는 종교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종교이론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종교생활이 바람직한가? 그런 감각이 있다. 그 감각이 종교적 신앙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ㄹ) 누구나 종교를 믿을 수 있다.
ㅁ) 종교를 믿어도 되지만, 지나치게, 광신도처럼 믿지 말라.
오늘날 교양있는 사람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다. 개인이 종교를 가진다. 어떤 이유이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종교를 믿는 태도가 중요하다. 당신이 광신도처럼 믿는다면, 당신에게 종교는 해가 된다. 그렇게 믿겠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태도가 종교적 믿음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태도를 과감히 버린다면, 그 사람은 종교적 신앙으로 들어가기 쉽다. 하지만 이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처럼 종교적 신앙은 주관적 확신에 머물지 않는다. 종교적 신앙은 상당히 정치적이다. 광신도처럼 믿지 말라는 요구는 이미 삶의 이해관심을 드러낸다. 종교신앙은 그런 이해관심을 해칠 수 없다. 정말 해친다면, 이해관심이 아니라 종교를 버려야 한다.
하지만 ㅁ) 같은 종교이론을 허용하지 않는 종교도 있다. ㄹ)과 ㅁ)을 떠받치는 이념은 대체로 자유주의 정치철학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종교적 문제에 상당히 약하다. 종교배경없이 자란 비종교인을 생각해보자. 그는 보통 순진한 자유주의를 견지한다. 종교는 개인 문제이며, 각 개인이 알아서 선택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에게 정작 종교적 질문을 해보면,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단계나 금융업에 쉽게 넘어간다. (흥미롭게도 그런 상업영역에서 '돈'을 강조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말한다. 비전을 심어주려고 한다. )
오늘날 분명 ㄹ)과 ㅁ)이 흔들린다. ㄹ)을 인정하니 결국 ㅁ)이 위태롭게 된다. 종교자유를 인정하니 광신도가 늘어나더라? 다시 ㅁ)을 단속하려고 하니 ㄹ)을 인정하기 어려워진다. 오늘날 과학 신봉 무신론자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ㅁ)을 지키기 위해 종교내용을 곧바로 비평하려고 한다. 그런데 종교내용을 과학으로 곧바로 비평하면, 결국 우리는 ㄹ)을 거부해야 한다. 형식적으로 종교자유를 인정할 수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런 자유를 행사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왜? 광신도가 될 수 없으니까. 과학적 비평은 결국 어떤 것이 믿을만 한지 결정하니까.
하지만 ㄹ)과 ㅁ)을 모두 인정하면서, ㅁ)에 머물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종교적 차원이 있다.
트랙백 주소 :: http://lacancenter.org/lacan/trackback/153
생각만들기
2010/01/20 08:53
lacan
어
떤 사람이 당신에게 기차를 설명한다고 상상해보자. 오른쪽에 KTX가 있고, 왼쪽에 무궁화가 있다. 안내인은 당신을 무궁화로
인도한다. 무궁화 실내를 당신에게 보여주며 열심히 무궁화의 장점을 열거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당신은 도착지에 빨리 도착하고
싶다. 하지만 안내인은 당신에게 무궁화가 KTX보다 얼마나 느린지 설명하지 않는다. 심지어 KTX 가 무궁화 옆에 있지만,
KTX 이야기도 꺼내지 않는다. 안내인은 왜 당신에게 KTX를 소개하지 않았을까?
ㄱ) 안내인도 KTX를 잘 모르니까.
ㄴ) 안내인이 다른 사람에게 뇌물을 받았다. 그래서 무궁화 장점만 늘어놓는다.
ㄷ) 당신에게 KTX 보다 무궁화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니까.
ㄹ) 안내인이 원래 무궁화를 좋아하니까.
ㅁ) 당신에게 무궁화의 장점을 강조하면, 당신은 은밀하게 KTX의 장점에 관심을 가지니까.
이
비유를 교육문제와 연결하여 생각해보자. 당신은 부모다.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교육할지 고민한다. 당신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조언한다. 이런 교육을 해라. 저런 교육을 해라. 그런데 그들이 비유에 등장한 안내인이라고 해보자. 그들은
당신에게 유익한 말을 하긴 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그들은 말했나? 안내인이 KTX를 말하지 않았듯이 소위 교육전문가도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ㄱ) 교육전문가는 정말 중요한 것을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ㄴ) 교육전문가는 정말 중요한 것을 안다.
일
단 두 개 전제를 세우면, 당신은 조금 허탈해질 것이다. 교육전문가의 말을 들을수록 결국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니까.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교육문제를 해소하는 법. 교육문제를 해소하는 법을 교육전문가가 이미 안다면, 왜 그것을 직접 말하지
않을까? 왜 부수적 이야기를 늘어놓을까? 핵심은 다른 곳에 있는데. 여기서 당신은 당장 이렇게 말하고 싶을게다. 비유가 원래
잘못되었다. 안내인이 KTX와 무궁화를 이미 안다면, 안내인이 일부러 KTX를 말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안내인이
KTX를 몰랐다면, 안내인은 무궁화의 장점을 늘어놓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똑같다. 현재 한국 교육문제를 해소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교육전문가가 알면서 모른 채 한다는 가정은 틀렸다.
트랙백 주소 :: http://lacancenter.org/lacan/trackback/152
생각만들기
2010/01/14 15:24
lacan
어
떤 엄마를 당신이 만났다고 해보자. 이 엄마는 상당히 잘산다. 그래서 자녀교육에 엄청나게 투자한다. 놀랍다. 그렇게 많은 돈을
쓰다니. 그런데 단지 교육비지출이 많은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아이가 공부에 시달린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방과후에도
공부하고, 도무지 아이에게 노는 시간이 있나 싶다. 아이 나이가 많지도 않다.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데,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한다. 엄마는 벌써 아이가 어느 대학에 들어갈지 결정했다고 한다. 이제 당신이 이 엄마에게 조언을 할 수 있다고 하자. 당신이
어떤 조언을 하더라도 당신에게 어떤 불이익도 없다. 한마디로 당신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자. 어떤 말을
엄마에게 하고 싶은가?
ㄱ) 아이에게 노는 시간도 필요하고, 엄마와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도 필요하답니다. 공부시간도 중요하지만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도 늘려 보세요.
ㄴ)
아이에게 공부를 많이 시켜서 솔직히 가슴이 조금 아프시죠. 아이가 공부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 엄마로서 가슴이 아플겁니다.
하지만 결국 아이가 겪어야 할 일이죠. 아이를 조금 섭섭하게 한다고, 아이가 힘들다고 불평한다고, 그냥 공부시간을 줄이면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요? 우리가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합니다. 그런 대가 없이 좋은 결과는 오지 않지요.
그러니 지금처럼 꾸준히 공부를 시키세요. 엄마는 상당히 잘하고 있습니다.
ㄷ) 공부를 열심히 시키되, 아이의 정서도 함께 돌봐야 해요. 정서를 돌보지 않으면, 오히려 아이와 엄마 관계가 나빠질 수 있으니까요.
균형이 중요합니다. 공부와 정서. 엄마관계와 교육. 이것들을 함께 생각하세요.
ㄹ)
아이에게 열심히 교육을 시키지만, 과연 그것이 아이를 위한 교육입니까? 아니면 엄마 욕심입니까? 제가 보기에 엄마욕심입니다.
엄마 욕심으로 열심히 시켜봐야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또한 조기교육은 아이에게 그렇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나이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하는데, 엄마는 지금 나이에 맞지 않는 선행학습을 하네요. 이러다 정말 큰 일납니다. 아이가 나이에 맞게 성장하도록 교육을
줄이세요.
트랙백 주소 :: http://lacancenter.org/lacan/trackback/151
생각만들기
2010/01/08 23:47
lacan
1. 공산주의 건설을 위하여
지젝을 지금까지 당신이 읽지 못했다면? 당신이 일단 지젝 번역본을 몇 개 가져와 비교를 해보라. 번역자가 달라야 한다. 번역자마다 지젝을 조금 다르게 소개한다. 어떤 번역자는 지젝에게 "혁명"이나 "급진"의 뜻을 붙인다. 다른 번역자는 그런 이름표를 되도록 피하면서 이력서처럼 소개글을 쓴다. 왜 그렇게 차이가 날까?
지젝 소개보다 더 재미있는 소재가 있다. 당신은 지젝 해설서를 몇 권 가져와서 목차를 비교해보라. 목차는 대체로 대학의 학위 논문 목차를 닮았다. 당신이 읽는 해설서는 학위논문과 비슷하다. 그런데 학위논문의 원래 독자는 누구일까? 대학에서 학위논문을 쓰는 학생은 교수를 의식하면서 논문을 쓴다. 교수가 논문을 심사하니까. 그런데 지젝 해설서를 쓰는 사람은 왜 학위논문처럼 책을 썼을까? 교수에게 검사받지도 않는데.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떤 깡패가 있다. 기자가 그를 취재하러 간다.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그는 다른 깡패 조직에 속해있다. 더구나 그 깡패와 사이가 나쁜 조직에 속해있다고 하자. 기자와 다른 조직깡패는 과연 그 깡패를 어떻게 기술할까? 아마 두 사람은 깡패를 조금씩 다르게 기술하겠지. 당신은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것이다. "뻔하구먼... 전달자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전달에 매우 중요하다. 지젝을 전달하는 사람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지젝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그래서 어쩌라고?"
여기서 다른 상상을 덧붙여보자. 깡패가 기자의 글을 읽었다고 해보자. 깡패는 기자의 글에 동의할까? 기자가 자신을 제대로 기술했는지 따질까? 물론 깡패는 기자가 진실하게 기술했는지 따질 수 있다. 하지만 깡패에게 은밀한 속셈이 있어, 기자가 사실과 다르게 기술하기를 바란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기자에게 거짓말을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저자가 있고, 독자가 있고, 전달자가 있다. 전달자는 저자를 독자에게 소개한다. 전달자는 저자와 독자가 어떤 관계를 맺기 원할까? 재미있게도 지금까지 이런 질문을 던진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전달자는 저자의 진실을 별로 원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전달자는 저자와 독자가 어떤 관계를 맺을지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전달자는 독자와 저자가 서로 싸우기를 바라며 저자를 기술할 수 있다. 전달자는 독자가 그저 저자의 말을 즐기기 바라며 저자를 기술할 수 있다. 즐기면 되지 정말 저자가 말한대로 따라하면 곤란하다. ...
지금까지 지젝 해설서를 쓴 전달자는 지젝과 독자가 어떤 관계를 맺기 바랬을까? 해설서를 쓴 전달자는 은근히 독자에게 자신을 닮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젝을 학위논문을 쓰는 학생처럼 읽으세요.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전달자 같은 지식인을 없애려 한다면, 우리는 지젝이란 저자를 어떻게 읽게 될까?
트랙백 주소 :: http://lacancenter.org/lacan/trackback/15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