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록
2010/02/23 08:52
lacan
패션잡지의 표지모델에게 매혹되는 이유.
ㄱ) 불안
ㄴ) 모델의 응시 : 수치와 부러움
=>
훌륭한 통찰이다.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아마 우리는 표지모델을 보면서 상당히 방어하는 것 같다. 모델은 모델일
뿐이야!! 하지만 왜 우리는 애써 모델과 우리 자신을 분리하려고 할까? 어쩌면 부스비의 지적처럼 우리는 표지모델을 보면서 이미
불안을 느끼는지 모른다.
=> 모델을 보면서 우리는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런 비교는 자주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이 주장은 간단하지만 우리 현실과 잘 맞는다. 나는 남자라서 절실히 못느끼지만, 외모에 대한 강박은
정말 여자에게 엄청난 것 같다. 최근 딸아이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며, 슬퍼하는 엄마를 봤다. 코와 턱 쪽에 화상을 입었는데,
정도는 조금 심할 수 있지만,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은 듯 했다. 그런데 엄마는 마치 자기 얼굴이 망가진 것처럼 하소연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아픈 것보다 더 아픈 사람처럼 말했다. 엄마가 신경쓰는 것은 어쩌면 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응시)일 수도...
모델이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응시)는 그만큼 힘이 세다. 부러움과 수치를 동시에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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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08:34
lacan
학원이나 과외를 정할 때, 누구의 말을 듣는가? 이 질문에 대한 통계를 봤다. 참 재미있게도 학생이나
학부모도 친구와 친척의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그런데 학생와 학부모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별로 듣지 않으며, 주로 스스로
선택한다고 대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통계는 매우 묘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당신이 주로 친구나 선배의 말을
듣고 학원(과외)를 선택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친구는 누구의 말을 들을까? 친구도 자기 친구의 말을 들을 것이다. 철수는 영희의
말을 듣고, 영희는 수희의 말을 듣고... 이렇게 계속될까? 이런 사슬은 결국 어디서 멈추게 될까?
ㄱ) 이상한 질문이다. 각
사람은 그냥 다른 사람에게 좋은 조언을 들으면 그만이다. 결국 내가 듣는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왜 신경쓰나?
ㄴ) 물론 다른 사람으로,
다른 사람으로 계속 추적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정보를 가진 사람을 찾으면 된다. 거짓 정보를 듣고 행동하면 정말 큰 일 나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할 때. 예를 들어 입시정보는 아무래도 진학하려는 학교에서 구해야 한다.
ㄷ) 훌륭한 지적이다. 그런데
기원을 추적하기 힘든 정보도 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 이런 정보가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 캐보더라도 우리는 진짜 기원을
찾기 힘들 것이다. 오히려 정보를 검증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ㄹ) 우리는 확실히 다른 사람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가
친구나 선배, 친척의 말을 잘 듣는다면, 이런 사람의 의견을 형성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ㅁ) 친구나 친척의 의견을
묻지 말라. 누가 친구나 친척의 의견을 형성하는지 묻지 말라. 차라리 당신이 의견을 만드는, 퍼뜨리는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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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4 09:08
lacan
정강길의 주장을 요약해보자.
ㄱ) 기독교의 신은 난폭한 군주이다.
ㄴ) 기독교의 신은 난폭한 군주라고 믿는 기독교인이 있다.
ㄷ) 이런 기독교인은 신을 위해서 쉽게 폭력을 휘두른다.
1. 신이 난폭한 군주라면....
신
이 난폭한 군주라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재미있게도 많은 사람이 정강길의 제안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정강길의 말이 맞다해도.
이유는 간단하다. 신이 난폭한 군주라면 당신은 신에게 대들 수 있겠나? 그러다 다친다. 신이 있다면, 우리는 신의 피조물이다.
신이 난폭한 군주라면 그냥 신의 말을 잘 듣는 것이 더 낫다. 적어도 생존에는 도움이 된다. 많은 사람이 감히 신에게 대들지
않을 것이다. 진화론이 가르치듯 대체로 생존을 위해 신의 말을 들을 것이다. 정강길처럼 신에게 대들다 끔찍한 벌?을 받으면
어쩌나? 신이 난폭한 군주라면, 우리는 생존을 위해 정강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심정으로 정강길에게 동의해도.
정
강길은 협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난폭한 군주인 신에게 대드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정강길의 말에 설득당해
많은 사람이 신에게 대든다고 하자. 돌연변이가 주류가 된 것이다. 신은 못된 인간을 모조리 없애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간이 다수이기에 인간을 모조리 없애려니 부담스럽다. 그래서 신은 조금은 인간과 협상할지 모른다. 정강길은 이런 가능성을
기대하고 글을 썼을까? 하지만 이런 가능성에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신에게 대들면 자존심을 세울지
모른다. 하지만 자존심을 목숨과 바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신이 없더라도 우리는 살기 위해 자존심을 꺾는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가정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욕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신이 난폭한 군주라면,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정강길은 이런 사람에게 돌을 던질 생각이 없을게다. 정강길은
근본주의자를 욕할 생각인가? 정강길이 그렇게 한다면, 정강길은 알게 모르게 자존심을 생명과 바꾸라고 호통치게 된다. 정강길도
그렇게 몰아붙이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2. 그래서, 당신같은 사람이 문제이니...
정
강길은 ㄴ)을 내세울지 모르겠다. 요점은 신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이다. 신이 난폭한 군주라고 믿으면 안되나? 그렇게 믿으면
무슨 사건이 벌어지나? 정강길은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나? 나는 그것을 모르겠다. 신이 난폭한 군주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정강길은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 난폭한 군주라고 믿는 것이 문제인가? 그렇게 믿고서 나쁜 짓을 하는 것이
문제인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문제라면, 믿음은 문제가 안된다. 그가 무엇을 믿든 우리는 그가 나쁜 짓을 못하게 막으면 된다.
(나쁜 짓을 점점 줄이게 돕던지)
정강길은 ㄷ)을 걱정하는 것 같다. 난폭한 신을 믿으면 난폭한 행동을 하기
쉽다. 정강길은 난폭한 신을 믿는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싶어한다. 혹은, 난폭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계속 믿지 말라고
권한다. 왜? 그렇게 믿으면 쉽게 난폭한 행동을 하니까. 하지만, 나는 이런 제안이 무척 보수적으로 보인다. 정강길이 정말
걱정하는 것은 사회이다. 개인의 믿음이 무슨 상관인가. 적어도 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믿고 싶은 것을 믿지 않나? 그런 자유를
보장하지 않나? 그렇다면, 정강길은 다른 사람의 신념에 왜 신경쓰나?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폭력이나
섹스가 넘쳐나는 영화도 검열해야한다. 그것도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줄지 모르니까.
정강길은 사회적 제제를 지지하지
않을 것 같다. 난폭한 신을 믿거나, 난폭한 영화를 본다고 그를 잡아간다면 숨막혀 못산다. 정강길도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단지 정강길은 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게 설득하고 싶으면 설득하시길... 단지 나는 그렇게
설득하고 싶지 않다. 왜 설득하나? 귀찮게. 나는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당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으시길'
정강길의 논증에 숨은 전제가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1) 난폭한 신을 믿는 자는 쉽게 난폭한 행동을 한다.
2) 폭력/섹스 영화를 많이 보면 비행을 쉽게 저지른다.
1)과 2) 는 비슷하다. 영화 애호가도 종교인이 성경읽는 것처럼 영화를 숭배한다. 그런데, 그가 폭력영화에 빠져있으니 쉽게 폭력을 휘두를까? 당장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폭력영화와 종교가 같나? 여기 가능성이 두 개 있다.
3) 폭력 영화와 종교는 다르다.
4) 영화든, 종교든 수용자의 태도가 중요하다.
1)
과 2)를 구분하고 싶은 사람은 3)이나 4)를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난폭한 신을 믿는 사람은 유별나다. 그는
유별나게 신을 믿는다. 그런 태도가 그를 망칠 수 있겠다. 하지만 정강길처럼 믿는다고 해보자. 그러면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심지어 어떤 사람이 난폭한 신을 믿어도 정강길처럼 믿는다면, 그는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강길은 난폭한 신을
믿는 자는 매우 독특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반면, 3) 처럼 영화와 종교는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종교는 영화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전염성이 강하다. 일단 종교를 믿으면 종교를 끊어버리기 힘들다. 특히 난폭한 신을
믿으면, 그런 믿음을 버리기 어렵다. 그런 사람들의 집단에 속하면 빠져나오기 정말 어렵다. 어떤 태도를 취하든 종교는 개인의
태도보다 힘이 세다.
따라서 정강길은 이렇게 가정한다.
난폭한 신을 믿는 종교는 매우 독특하다.
(워낙 감염성이 강하므로 한번 물들면 행위까지 결정한다.)
난폭한 신을 믿는 사람의 태도가 매우 독특하다.
( 우리는 이성적으로 믿지만, 그는 이상하게 믿는다. )
근
본주의자에게 가서 한번 물어보라. 정말 저렇게 믿는지.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가정이 참 순진하여 정강길 자신도 저런 가정을 정말
참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식인종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관점 같다. 사람을 잡아먹다니!! 식인종이 믿는 종교는 분명
이상할 것이고, 식인종도 현대인과 분명 다를거야!
2-1. 내가 좋아할만한 사람을 좋아한다....
ㄹ) 기독교의 신은 난폭한 군주가 아니다.
ㅁ) 기독교의 신은 난폭한 군주이다. 하지만 이제 기독교의 신은 바뀌어야 한다.
ㅂ) 어떤 신자는 기독교의 신이 난폭한 군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신관은 바뀌어야 한다.
정
강길은 대체로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정강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단 ㄹ)을 보자. 구약을 보면 기독교의 신은 난폭하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이미 정경에 그렇게 나와 있으므로 그냥 인정하면 된다. 판단이야 개인이 알아서 하겠지만. 그런데 ㅁ) 부터
문제가 꼬인다. 기독교의 신이 난폭하다고 인정한 후 그것을 바꾸자고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대체로 이런 생각을 품는다.
어떤 종교에 이런 저런 특성이 있다. 그런데 그런 특성이 마음에 안든다. 그렇다면 그것을 과감히 바꾸면 되지 않을까?
하
지만 그런 논리로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구약과 신약은 상당히 다르다. 신관도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대체로 구약과 신약을 모두 정경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을 통합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과제다. 난폭한 신을
제거하면 당신은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신약성서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진지하게 탐구하고 나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다른 종교도 똑같다.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쉽게 자기 마음대로 해버린다. 내 마음에
드는 내용은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을 없애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나? 이것은 연애도
똑같다. 내 마음에 드는 행동만 요구하거나, 내 마음에 들도록 상대를 조작하려고 해보라. 오래 못간다. 당신도 그런 요구를 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정강길의 주장을 살리는 길이 있긴 하다. ㅁ)이나 ㅂ) 을 원래 기독교가 요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원래 기독교가 <난폭한 신관>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ㅁ)이나 ㅂ)도 말이 된다. 이 문제는
진지한 토론거리로 남겨둔다.
3. 사회공학으로...
정말 진지한 정치인이라면, 평화가
유지되길 원할 것이다. 그런 정치인은 종교문제 해결을 위해 정강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정강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종교적
갈등이 없는 사회가 될까? 앞에서 논의했듯이 정강길의 제안은 난폭한 신을 믿는 자에게 거의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더욱 화나게 할지 모른다. 신자는 어쩌면 화풀이로 더욱 난폭하게 행동할지 모른다.
정강길 제안 -> 종교인 자극 -> 폭력 충동 -> 폭력 사건 발생.
정
강길의 제안은 원래 의도와 반대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회공학으로 따지자면, 정강길은 특정한 종교인을 고립시키는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그런 사람을 고립시킬수록 폭력 사건은 더욱 쉽게 일어날지 모른다. 따라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이 자기 믿고 싶은대로 믿으면서 폭력을 덜 사용해야 한다. 내가 볼 때, 이런 길을 찾는 것이 더 낫다. 정강길처럼 특정한
믿음을 비판한다면, 특정한 믿음을 제한하게 된다. 정강길은 난폭한 신을 믿지 말라고 제안하는데, 난폭한 신을 믿는 사람에게 매우
기분 나쁜 제안이다.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줘야 하나? 이런 스트레스는 계속 된다. 돈을 많이 벌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
동성도 결혼하게 해달라고 주장하는 사람.... 이런 사람의 생각을 낱낱이 비판하며 설득해야 할까? 일단 귀찮다. 차라리 믿고
싶은 대로 믿되 폭력을 줄이는 법을 찾는다면, 그것이 훨씬 낫다. 제대로 계산을 하는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이것을 선호할
것이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 종교 사회공학 <= 폭력을 줄인다.
정치인에게 종교 사회공학을 권한다. 실용적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이것을 고민할 것이다. 정강길처럼 해봤자 효과도 없는 종교내용비판을 왜 하나? 정치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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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0 08:37
lacan
오늘날 좌익이론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좌익이론은 새로운 집단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좌익이론은 원래 의도와 다르게
좌익정치에 해로운 태도를 퍼뜨린다. 좌익이론은 좌익이론가의 태도를 퍼뜨린다. 그래서 좌익이론을 읽은 사람은 좌익이론가의 태도에
감염된다. 그런 태도에 감염되면, 새로운 집단을 만들기 어렵다.
매우 간단한 결론이다. 하지만 먼저 우리의 결론을 반박하는 증거를 살펴보자.
ㄱ) 좌익이론은 대체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따라서 좌익이론을 접하는 사람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것이다.
ㄴ) 좌익이론가도 나름대로 집단을 이룬다. 집단을 통해서 계속 좌익이론을 퍼뜨린다.
ㄷ) 좌익이론가의 태도가 전달된다면, 그것은 좋다. 당신이 좌익이론가의 태도를 배운다면, 당신은 결국 좌익정치를 지지할 것이다.
도
킨스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이다. 도킨스의 독자는 무신론자처럼 행동한다. 독자는 단순한 무신론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나서서
종교에 반대하고 반종교적 집단을 만든다. 도킨스는 책에서 주로 진화론을 논했다. 하지만 독자는 정작 무신론에 열광한다.
무신론자로 거듭난다. 재미있게도 도킨스의 태도가 전달되었다. 독자는 무신론에 감염되었다. 도킨스와 좌익이론가를 비교해보자.
비슷하다. 좌익이론가의 책을 읽은 사람은 좌익이론가처럼 행동한다. 좌익이론가의 태도가 전달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좌익이론가는
대체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정치에 대해 불평한다. 독자도 그들처럼 정치에 불평한다. 하지만 자신이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새로운 집단이 생기지 않는다. 도킨스의 독자는 무신론자 집단을 형성했다. 하지만 좌익이론가의 독자는
정치적 집단을 형성하지 못한다. 물론 그들은 공부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공부모임은 정치적 집단이 아니다. 공부집단은 한
몸처럼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지 못한다.
따라서 좌익이론의 결과는 정말 역설적이다. 좌익이론의 독자는
자본주의에 불평한다. 현실 정치에 불평한다. 그래서 독자는 자본주의가 곧 망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자는 정치적
집단을 만들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들 수 없다. 독자는 좌익이론가의 태도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될까? 좌익이론을 읽은 독자가 늘어날수록 새로운 집단 만들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당신이 좌익이론에 정말 관심 있다면,
좌익이론의 내용보다 좌익이론이 무엇을 전달하는지 주목하라.
앞에서 말한, 반론 3개에 간단히 답해보자.
ㄱ-1.
좌익이론을 접한 사람이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자본주의를 비판해도 여전히 자본주의가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도 많다. 또한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어떻게 비판하는지 살펴야 한다. 당신이 좌익이론가처럼 비판한다면, 당신은 자본주의의 약점/결함을 고치기 어렵다.
당신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비판해야 자본주의가 변할지 생각해보라.
ㄴ-1. 좌익이론가도 집단을 이룬다?
맞다. 그들도 집단을 이룬다. 그런데 그들의 집단이 과연 집단인가? 또한 그들의 집단이 집단이라 해도, 과연 정치적 집단인가?
그들이 정치적 힘을 발휘하나? 아직 그런 증거는 없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많은 학생이 집단을 이뤄 공부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치적 힘은 거의 없다. 그들은 아직 정치적 집단이 되지 않았으니까.
ㄷ-1. 좌익이론가의 태도가 과연
무엇일까? 도킨스와 좌익이론가를 비교해보라. 도킨스의 독자는 정치적 집단을 이룬다. 하지만 좌익이론가의 독자는 그렇지 않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나? 놀랍게도 좌익이론가 가운데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신도 한번 솔직하게 물어보라. 재미있게도
도킨스의 책에는 정치적 집단을 만들고 행동하자는 구호가 없다. 그런 이론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도킨스의 진화론을
활용하여 그런 이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단지 도킨스가 책에서 분명하게 그런 내용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킨스의
독자는 정치적 집단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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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23:14
lacan
나는 옛부터 좌익정치가 망했다고 생각했다. 이 글에서 나는 이유를 간단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좌익정치가 왜 망했나? 흔히 말하는 좌익 이론가와 좌익 (문화) 평론가를 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밈을 한번 생각해보자.
ㄱ) A는 A를 낳는다.
이 논리는 좌익이론에도 적용된다. 그렇다면 좌익이론은 무엇을 낳을까?
ㄴ) 좌익 이론은 좌익 이론을 낳는다.
보
통 이렇게 생각한다. 좌익이 선호하는 주제가 있다. 좌익은 대체로 진보적 정치를 추구하고, 자본주의의 몇몇 경향에 반대한다.
주로 이런 방향으로 글을 쓰고, 이론을 펼친다. 그들의 글을 읽은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따라서 좌익이론은 좌익이론을
낳는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다. 하지만 내용은 조금씩 바뀐다. 좌익이론을 선호하거나, 좌익 정치를 선호해도 조금씩 다른 내용을
주장하기도 한다. 오히려 내용보다 다른 것이 계속 복제/전달된다.
ㄷ) 좌익 이론은 태도를 낳는다.
이것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 좌익평론가의 글을 읽고, 사람들은 좌익평론가의 "생각/의견"을 배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태도를 배운다. 태도가 전달된다. 좌익 평론가의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은 좌익 평론가처럼 살아간다. 태도가 전달된다. (혹은 복제된다.)
이
주장은 조금 허탈하게 보인다. 태도가 전달되고 복제된다고 해보자. 당신은 좌익이론에 해박하고, 나름대로 비평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체제에 전혀 위협을 주지 않는다. 당신은 좌익 평론가처럼 말하고 행동하니까. 오늘날 좌익평론가는 체제에
위협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 정치 활동가의 글을 한번 읽어보라. 당신이 레닌의 글을 한번 읽어보라. 레닌은 독자가 자신처럼 행동하기 원하는 것 같다. 당신이 레닌의 의도를 제대로 읽었다면, 당신은 레닌처럼 행동할 것이다.
내
말이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이 잠시 편견을 내려놓고 역사를 한번 보라. 20년전 한국좌익이론을 한번 찾아보라.
그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살펴보라. 지금 좌익이 하는 얘기와 상당히 다르다. 주요 이론가도 다르다. 그런데 그 때
좌익이었던 사람이 지금도 대체로 좌익을 선호한다. 결국 무엇이 전달되었나? 알튀세르나 라깡? 아니다. 좌익스런 태도가
전달되었다. 그런데 좌익이론가 가운데 행동을 촉구하거나 당신에게 정치적 결단을 요구한 사람은 거의 없다. 왜? 그들은 대체로
좌익평론가이며, 좌익평론가의 태도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ㄹ) 체제를 위협하는 태도를 전달해야 하나? 그렇다면 무엇이 체제를 위협하는 태도인가?
[물론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체제를 꼭 위협해야 하나?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 이 문제를 풀기위해 먼저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다.
ㅁ) 이론가는 이론가다. 이론가가 실천가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보
통 ㅁ)를 많이 말한다. 하지만 나는 태도가 전달된다고 말했다. 이론가가 이론을 말하더라도, 은밀히 태도가 전달된다. 따라서
ㅁ)을 주장할 수 있지만, 전달되는 것은 태도이다. 반면, 예언자나 사도는 말과 존재를 그렇게 분리하지 않는다.
무엇을 전달되는지 고려한다면, 흔한 대립도 피할 수 있다. 보통 이론가는 실천적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고 구박한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이론가가 실천적 대안을 내놓았다고 하자. 당신은 대안을 실천할 마음이 있나? 여기서 사람들은 다시 이렇게 따지려고 한다. 대안이 과연 현실적인지 따져보자... 결국 논의는 계속 된다. 행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의 분리로 고민하는 것은 그다지 소득이 없다. 앞서 말한대로 태도가 전달된다면, 우리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ㅅ) 이론가든, 실천가든, 이론을 펼칠 때, 어떤 행동을 할 때, 실제로 무엇이 전달되나?
ㅇ) 말과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까?
=>
이것이 훨씬 중요한 것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내용을 가지고 떠든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자세히 보라.
지금 도덕적으로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태도가 전달되고, 반복되는지 주시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날 좌익이
떠드는 주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내용은 아무 상관이 없느냐 => 좌익과 우익이 주장하는 내용은 분명 다르다. 당신이 좌익에 속했다면, 일단 그 쪽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나의 주장에 따르면, 좌익안에서 내용의 차이는 큰 뜻이 없다.
**그래도 내용에 따라 결국 행동이 결정되는게 아니냐 : 하지만 나는 다시 묻고 싶다. 정말 그렇더냐? 내가 볼 때 이 질문을
많은 좌익이론가가 무시했다. 어떤 이론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했다. 그들이 "누구처럼" 말하는지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배우고 행동하는지 알아보자.. 그런 뜻인가? : 일반적 학습심리학보다 학습사회학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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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
2010/02/04 13:05
lacan
1. 똥이나 항문 이야기는 확실히 거북하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욕가운데 똥이나 항문을 활용하는 욕이 많다.
2. 왜 정신분석은 똥이나 항문 이야기를 하는걸까? 심지어 그것을 부모와 아이의 관계로 해석할까?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닐까? 아무런 뜻이 없는 현상에 너무 많은 뜻을 부여하지 않는가?
=>
바로 여기에 정신분석의 핵심이 숨어있다. 정말 프로이트가 말한대로 무의식이 있다면, (어떻게 있든 간에) 우리는 무의식에 쉽게
다가갈 수 없고, 쉽게 이해할 수도 없으며, 익숙하게 만들 수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똥과 항문은 바로 몸의 무의식이다.
(당신은 항문을 볼 수 없다. 거울을 이용하지 않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항문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3.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팔루스
3-1.
리처드 부스비는 자기 경험을 아주 재미있게 풀어낸다. 전통적 정신분석에 따르면, 아빠에게 페니스가 있지만 엄마에게 없다.
아빠에게 있다. 엄마에게 없다. => 하지만 사람들은 자주 오해한다. 정신분석이 여자를 부족한 존재?로 본다고...
정확하게 말해 정신분석이 그렇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은 아이의 인지를 보고한다. 즉 아이는 그렇게 "인지"한다.
3-2.
그래서 부스비는 자기 아이에게 정말 바로 가르쳤다고 한다. 아빠에게 남자 성기가 있고!, 엄마에게 여자 성기가 있다고. 즉
아빠는 무엇을 가지고 엄마는 뭔가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아빠도 남자 성기를 가지고, 엄마도 여자 성기를 가진다. 엄마는
아빠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뭔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이에게 그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도 그 말을
이해했다.
=> 그래도 아이는 뭔가 오해한다고 한다. 부스비는 여기서 조금 놀랐다고 한다. 아이는 나중에
부스비와 부스비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에게 털이 있고, 아빠에게 털과 페니스가 있다고!! 아이가 볼 때 (4세
아이) 엄마의 성기는 털이다. 정말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이다. 그리고 아빠에게 털과 페니스가 있다. 따라서 정신분석과 반대로
가르쳐도 아이는 여전히 남자에게 하나가 더 있다고 인지한다. 결국 아빠는 엄마에 비해 하나 더 가진 셈이다. 설사 엄마에게
결여된 것이 없더라도.
(물론 이것은 오해이며, 나이가 들면 오해가 풀어진다.) => 정신분석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오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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