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0/03/25 lacan 몹쓸교육학(6)
  2. 2010/03/17 lacan 몹쓸교육학(5)
  3. 2010/03/14 lacan [영화]디어 존
  4. 2010/03/09 lacan 섹스온더카우치(6)
  5. 2010/03/08 lacan 성공의 기준(2)
  6. 2010/03/05 lacan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7. 2010/03/02 lacan 포스 카인드

몹쓸교육학(6)

생각만들기 2010/03/25 21:49 lacan
영화 무법자를 보면 끔찍한 젊은이들이 나온다. 이들은 부유한 계층을 증오한다. 상류계급의 여자들을 납치하여 고문하고 죽인다. 젊은이들은 대체로 하층민에 속한다. 젊은이들이 왜 무고한 여자를 잡아서 죽일까? 이유는 많을 것이다. 젊은이는 마치 복수하는 사람 같다. 이들은 사회에서 성공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 같다. 이들은 좌절하다가 그만 분노를 품었을지 모른다. 과연 누가 우리 운명을 이렇게 기구하게 만들었나? 그들의 분노는 부한 자를 겨냥했다. 부한 자가 젊은이들을 가난하게 만들지 않았다. 단지 부한 자는 젊은이들이 가지지 못한 부와 명예를 가진다. 젊은이들이 얼마나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을까? 충분히 공감이 간다.

영화 이야기? 현실이 과연 다를까? 내 친구는 명문대 출신으로 모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그 대학에 명문대 출신 교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친구는 주위 사람의 시선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학생이나 동료 교수나 자신을 조금은 이상하게 본다. 이 대학을 곧 떠나 더 나은 곳으로 가겠지... 친구는 이런 분위기를 느꼈다. 명문대 출신 교수는 그 대학에 별로 없었으니까. 이것이 왕따는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은 사뭇 배척하는 시선이다. 묘한 적대감은 여전하다.

사람들은 명문대의 장점으로 명성을 꼽는다. 당신이 명문대 출신이라고 하자. 주위 사람은 당신을 다르게 볼거야. 당신은 특별한 존재야. 당신이 명문대 출신이라면 이런 시선을 선물?로 받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런 선물을 누리려고 그렇게 명문대에 목을 매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장점은 동전의 한쪽면이다. 다른 면을 봐야 한다. 다른 면은 바로 적대감이다. 조금 이상하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까? 우리 교육은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심어준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만든다. 물론 이런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교육을 받으면 서로 싸운다. 이것은 교육의 부작용이다. 교육은 원래 싸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실행하는 교육이 사람들을 싸우게 만든다면, 그것은 교육의 부작용이다. 교육을 잘못 실했을 때 사람들은 싸운다. 교육을 제대로 수행하면 사람들은 싸우지 않는다. 아마 이것이 우리의 통념일 것이다.

하지만 교육에서 발생하는 적대감이 과연 교육의 부작용일까? 아니면 교육의 원래 모습일까?

몹쓸교육학(5)

생각만들기 2010/03/17 08:13 lacan
왜 그렇게 교육에 집착하십니까? 아주 강력한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교육은 미래 준비를 뜻한다. 앞으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이것이 전부인가? 여기서 조금 더 첨가해야 한다. 미래 사회적 위치는 대체로 고정된다. 한번 저소득층으로 굴러 떨어지면 다시 고소득층으로 오르기 어렵다. 이제 그림을 완성해보자. 교육은 미래 사회적 위치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그리고 미래 사회적 위치를 쉽게 바꿀 수 없다. 따라서 미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할 때 교육을 무시할 수 없다. 어쩌면 교육은 유일한 열쇠인지 모른다.

일단 이 생각이 맞는지 따지지 말자. 우리는 그냥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에 목을 매단다. 여기서 둘째 주장을 잠시 검토해보자. 미래 사회적 위치를 바꾸기 어렵다? 그럼 당신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 한번 생각해보라. 어떤 사회는 당신에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부러 당신 인생을 망치려고 덤비지도 않는다. 그냥 당신에게 당신의 인생을 맡겨둔다. 당신 인생은 당신이 선택한 결과이다. 하지만 당신이 일단 선택했다면, 그것을 되돌리기 어렵다.

반면 다른 사회는 당신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를 준다. 그런 기회를 주도록 사회제도를 정비한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때, 당신은 인생을 바꿀 기회를 쓸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인생을 바꿀 기회를 주는 사회에 살고 싶을 것이다. 우리 사회도 그런 사회로 만들면 어떨까? 그런데 교육이 인생을 바꿀 기회라고 해보자. 다른 기회는 없을까?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킨다. 인생을 바꿀 기회를 준다. 어른은 어떻게 되나? 어른도 인생을 바꾸려면 교육을 받아야 할까? 너무 경직된 사고다. 교육만이 인생을 바꿀 수단이라면 얼마나 불편한가?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아야 되니까?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따라서 이렇게 생각해보자.

ㄱ) 사람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를 주자.

ㄴ) 인생을 바꿀 기회를 언제 사용할지 개인이 정하도록 하자.

ㄷ) 인생을 바꿀 기회를 쓰기 위해 반드시 교육을 받을 필요는 없다.

교육은 인생을 바꿀 밑천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문제가 많다. 교육은 대체로 능력을 기른다. 교육은 능력있는 사람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능력있는 사람이 일을 잘 할까? 그런 보장은 없다. 교육이 보장한 능력은 반드시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할 때 일을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능력이 있어도 일을 못하면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직업을 잃을 수 있다. 교육 성과로 어떤 사람의 임금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우습다. (특수 전문직은 다소 예외가 되겠지만. 그러나 의사를 생각해도 결국 의료현장에서 일을 잘하는 의사가 인정받는다. 단지 교육기관에서 성적이 좋다고 우대할 수는 없다.)

이 런 것을 생각할 때, 교육은 인생을 바꿀 기회로 그다지 좋지 않다. 차라리 구약성서에 나온 빚청산법을 떠올려보자.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회구성원의 빚을 모두 없애준다. 빚을 0으로 만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런 법규가 오히려 인생을 바꿀 기회로 적절하다. 빚이 없다고 해서 당장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많은 사람에게 기회로 작용한다. 한 걸음 더 나가 <기회-부여자금>을 만들면 어떨까? 어떤 사람이 인생을 바꾸고 싶을 때 그는 <기회-부여 자금>을 사회에 신청한다.

ㄹ)  빚을 없애준다. (기간은 적절하게 정하면 된다. 예를 들어 10년 주기로)

ㅁ) 개인은 <기회-부여자금>을 사회에 청구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빚청산을 악용하면 어떻게 하나요? 빚청산 기회를 공평하게 부여하되 계층에 따라 누진적으로 청산하자. 고소득계층은 빚청산비율이 적다. 반면 저소득계층은 거의 모든 빚을 청산 받는다.

[영화]디어 존

생각만들기 2010/03/14 08:01 lacan
1. 첫 눈에 반하다.

교회 지체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배우자 이야기가 나왔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기혼자였다. 한 명이 대뜸 이렇게 외쳤다. "눈을 확 낮춰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소 심술이 돋은 나는 그에게 물어봤다. "그럼. 본인은 눈을 낮춰 결혼을 했나요?" 그의 목소리를 단호했다. "그럼요"

누가 누구에게 눈을 낮췄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눈을 낮춰야 한다는 조언에 동의한다. 단지 눈을 낮추는 것도 때로 교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 내가 너를 받아줄께. 그만큰 난 마음을 비웠어. 내가 상대보다 더 관대하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눈을 얼마나 낮춰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 연인도 있다. 첫 눈에 반하는 연인들. 이 남자, 이 여자라는 확신이 십계명이 돌판에 새겨지듯 마음에 새겨진다고 하니. 아마 눈높이를 따지는 사람에게 이런 얘기는 천국 얘기처럼 들리겠다. 하지만 내가 체험하지 못했다고 감히 없다고 말할 수 있나. 첫 눈에 반하는 연인은 지금도 있다. 이 사람이 곧 내 사람이란 확신이 번개처럼 내려치는 연인도 분명 있다.


2. 그들도 고통을 통과해야.

영화 주인공은 2주 만나고 평생을 약속한다. 좋다. 첫 눈에 반한 연인의 비밀을 연애 하수가 어떻게 이해하리요. 그냥 받아들여야지. 이들에게 2주는 평생을 약속하는 시간이 된다. 예수를 믿는데 몇 초도 안되니 2주도 어쩌면 짧은 시간은 아니겠다. 하지만 이들이 한 약속은 뜻밖의 사건으로 흔들린다. 9/11이 터지고, 새로운 연인이 등장하고... 이런 사정으로 연인들은 결국 이별하고 만다. 여기까지 너무 뻔하다. 미칠듯이 사랑했지만, 상황이 바뀌니까 마음도 갈라서더라. 입대 전에 연애한 남자는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갈라선 이유는 예사롭지 않다. 서로를 향한 응시가 변질되어 결심이 틀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각 자의 삶에 너무 진지했기에 결심이 틀어져버렸다. 이들은 주변 사람을 너무 사랑했기에 결심을 밀고 나가지 못했다.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식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의 운명을 사고로 봐야 할까?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했다.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단지 상황이 이들을 방해하여 이들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물론 상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자 주인공을 마음을 흔든 연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9/11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아마 이들은 행복하게 다시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방해한 상황은 더 중요한 비밀을 감춘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아무런 사건도 터지지 않고 이들이 다시 만나 결혼했다면 과연 잘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순조롭게 결혼했더라도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첫 눈에 반한 사랑에도 어려움이 있다. 사랑은 고통을 만든다. 두 사람을 미친듯이 하나로 묶어놓은 사랑이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는 폭탄이 될 수 있다. 사랑의 깊이를 들여다 본 사람은 아마 알 것이다. 차라리 이들이 첫 눈에 반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에게 외부 충격이 없었더라도 그들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외부 충격으로 그들이 겪은 고통은 사실 앞으로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었다. 그들은 마치 연습하듯 미리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영화 결말은 좋다. 그들은 외부 충격을 결국 이겨냈다. 외부충격으로 그들이 겪은 고통은 사랑에서 나오는 고통과 같다. 한 사람은 상대방의 배신에 분노하고, 다른 사람은 상대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한 사람에게 이미 배우자가 있지만, 여전히 첫 연인을 잊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연인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전쟁터에서 소비한다. 목숨을 담보로.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이겨낸다.


3. 사랑의 이데아

주인공들은 다시 만난다. 일단 좋은 결말이다. 사랑이 완성되려면 분명 다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세상 일은 모른다. 주인공들이 고통을 겪으며 참된 사랑을 깨달았다 해도 다시 만나서 사랑을 나눌지 모른다. 한번 헤어진 연인을 보면 다시 만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지만 너무 늦은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완전한 결말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조건 성공하고 볼 일인가? 혹시 연인도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닐까? 연인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참된 사랑에 조금씩 다가간다면, 비록 연인관계가 유지되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겠다. 인인관계의 실패와 성공은 사랑의 모든 것이 아니니까. 정말 어려운 일은 깨달음 다음에 오는 것 같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고통을 통과하면서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깨닫고 나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이 사람을,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주인공은 옛 여인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준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줬지만, 그 연인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해보자. 과연 그는 다른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것이 정말 어렵다. 우리는 사랑의 깊이를 경험한다. 그러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은 종종 사랑을 아예 잃어버리기도 한다. 부활절은 좋은 예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사랑했지만, 예수를 배반하고 말았다. 부활 후 예수는 다시 베드로를 찾아온다. 당연히 이 만남은 껄끄럽고 심드렁하다. 베드로는 이미 회개했다. 예수를 배반한 것을. 하지만 배신하고 회개한 후 다시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을까? 요한복음은 답을 하지 않고 끝나버린다. 아마 실망하고 실족하지 않고 사랑을 반복하면서 참된 사랑으로 나갈 때, 참된 사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반복은 사랑의 허무주의와 다르다. 사랑의 반복은 참된 사랑으로 나가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

섹스온더카우치(6)

강의록 2010/03/09 23:49 lacan
페니스와 팔루스 : 무엇이 다를까?

페니스의 어원을 따져보자. 그리스어를 찾아보면 페니스의 뜻은 대체로 꼬리라고 한다. 페니스는 정말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면 팔루스는 다르다. 팔루스도 페니스를 가리킨다. 하지만 팔루스에 다른 뜻도 있다. 팔루스는 두드러진 것, 돋보이는 것을 뜻한다. 팔루스는 발기에 가깝다. 발기한 성기는 확실히 돋보인다. ㅎㅎ 따라서 팔루스를 찾는다/얻는다고 할 때, 확실히 어떤 것이 자극한다.

남자와 여자가 팔루스를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여자는 권력있는 남자와 함께 있다. 재미있게도 예쁘고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재벌과 함께 있는 설정/구도는 영화나 연속극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능력도 없고, 못생긴 남자와 예쁘고 젊은 여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연인은 영화나 연속극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런 연인은 드문 것 같다.

여자에게 능력있고 멋있는 남자가(능력에 반드시 경제력이 포함된다.) 팔루스라면, 남자에게 소유물이 팔루스이다. 여자에게 그런 남자와 어울리는 것, 그런 남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남자는 자동차와 부동산, 여자를 소유물처럼 가지려 한다. 남자에게 이런 것이 팔루스이다. 하지만 남자가 이렇게 생각한다. 남자가 그런 팔루스를 가지고 있어야 여자에게 사랑을 받는다. 이렇게 본다면, 여자가 원하는 것이 팔루스이지만 남자는 자동차, 부동산, 경제력, 명성을 지녀야만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동차, 부동산, 재력... 이런 것은 팔루스의 상징이다.

여자가 나쁜 남자에게 끌린다는 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쁜 짓/태도에 끌린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나쁘다는 말은 남자가 가진 독특한 능력을 뜻한다. 모든 남자가 강력한 재력과 명성을 가지나? 그렇지 않다. 그래도 많은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여 결혼한다. 결혼한 남자는 적어도 배우자를 유혹할만한 팔루스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가지지만 여자는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여자에게 "보여지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남자는 여자의 이런 특징을 견디기 힘들다. 여자가 나타날 때, 여자는 애인에게도 나타나지만 다른 남자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애인이 굉장한 미인이라고 해보자. 애인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예쁘게 단장을 했다. 애인은 분명 남자를 위해 단장을 했지만, 다른 남자도 결국 애인을 본다. 팔루스를 주로 "가진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다른 남자가 애인을 보면 조금 불편해진다. 그래서 남자는 되도록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한다. 도저히 다른 남자가 애인을 넘보지 못하도록. 재벌의 애인을 누가 넘보겠는가? 재벌만큼 강력하지 않다면..




성공의 기준(2)

생각만들기 2010/03/08 00:10 lacan
이제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얘기요!

일단 대안이 아닌 것부터 한번 따져보자.

ㄱ) 우리는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추구는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당신이 행복하게 놔두지 않는다. 당신이 정말 행복을 얻었더라도 당신을 기어이 불행하게 만든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는 행복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ㄴ)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

요즘 유행하는 지침이다. 이것부터 분명히 하자. 욕망을 정말 포기하지 않을 수 있나? 그렇다. 당신은 욕망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다. 욕망을 고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 지침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 않다. 당신은 욕망을 고수할 수 있다. 정말 요점은 다른 곳에 있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 이것은 다소 허망하다. 이 주장은 대체로 칸트의 윤리학을 따른다.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다. 당신이 무엇을 욕망하는가?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취미생활을 포기하지 않을거야!! 이런 욕망? 재미있게도 바디우는 충실성을 따지면서 정치, 사랑, 과학을 지적한다. 왜 취미생활이 아니라 과학일까? 지젝의 말처럼 이 지침을 따르면 새로운 "기회"가 생기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새로운 생활터전까지 마련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사회가 정립되어야 하는데, 그냥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기회만 제공하는 것 같다. 그 후에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 못한다. 정말 제대로 된 지침이라면 새로운 사회, 새로운 공동체까지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지침은 개인의 고독한 투쟁으로 끝나버리기 쉽다.


ㄷ)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남에게 도움이 될 때,
ㄹ)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남이 나를 인정할 때,

ㅁ) 남이 무슨 일을 하든 나에게 도움이 될 때,
ㅂ) 남이 무슨 일을 하든 내가 남을 인정할 때,

위 4 주장이 상당히 중요하다. 먼저 도움과 인정이 같이 가야 한다. 남이 나에게 도움을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런데 도움만으로 부족하다. 내가 남을 인정해야 한다. 남이 나를 도운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남은 아마 실망할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이란 구절이 상당히 중요하다. 당연히 내가 남에게 해를 입혀선 안된다. 이 조건 아래서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남이 도움을 받고 남이 나를 인정도 한다고 생각해보라. 이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이런 사회에서 아마 사람들이 직업 종류에 지금처럼 목을 매달지 않을 것이다. 직업종류는 사실 인정욕구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청소부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자신이 청소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일하는 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 하지만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지든 남이 당신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직업종류 때문에 맘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외국인이 신입생 면접을 했다. 신입생에게 앞으로 어떻게 생활할 거냐고 물었더니 신입생이 너무나 자세하게 대답했다. 외국인은 흠칫 놀랬다고 한다. 이제 겨우 20살인데,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말하다니... 외국인이 보기에 한국의 대학교 신입생은 지나치게 사회에 편입되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미리/앞질러 성취하려는 의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 외국인은 이것이 다소 천박하게 보였나 보다. 인생을 궁리하기 보다 그저 생존하기에 목을 매는 젊은이. 아마 외국인에게 한국 젊은이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물론 한국 형편이 넉넉지 않다고 변명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젊은이에게 인생을 궁리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런 변명도 외국인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을 인도하는 기준이 사회적응이라면, 우리는 인생궁리보다 적응에 매진할테니까. 여기서 이렇게 물어보자. 사회적응을 목적으로 살면 안되나? 무슨 잘못이 있나? 대체로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쓰지 않나? 그런데 우리 자신을 잘 관찰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 적응에 성공한 사람을 좋게 평가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도 그는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회적응만 신경쓴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지만 조금은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그는 분명 성공했지만 속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ㄱ) 사회 적응에 성공했다. 하지만 사회적응만 신경쓰는 사람은 이상하게 보인다.

이런 사람은 어떤가? 사회 적응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고귀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부와 지위가 약하다. 돈도 많이 모으지 못했고 사회적 명성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고귀한 목적을 추구하며 남다르게 행동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를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말 그 사람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가 고귀한 목적을 추구한다고 인정하지만 그의 삶을 모범으로 삼지 않는다. 쉽게 말해 자식에게 그 사람처럼 살라고 권하지 않는다.

ㄴ) 우리는 고귀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사람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다.

일단 이것을 기억하자. 사회적응과 다른 고귀한 목적?은 정말 고귀한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환상에 가깝다. 조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한다.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자원봉사도 하고, 기부도 하며, 사회활동도 한다. 나는 사회 적응만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적어도 스스로 이렇게 외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삶이 과연 주장 ㄴ)과 다른지 따져봐야한다. 그가 하는 사회활동/선한 활동은 사회적응의 윤활유와 같다. 그가 여가를 이용하여 하는 활동은 사회적응을 바꾸거나, 사회적응에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적응을 보충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차원을 생각해봐야 한다.

ㄷ) 사회적응활동은 어떤 윤리적 차원을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차원은 사회적응활동을 보충한다.

예를 들어 영화나 연속극의 주인공은 세속적 성공에 미쳐 모든 것을 쏟아붇는다. 하지만 그는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깨닫는다. 과감히 성공의 길을 버리고 "자기 삶?"을 찾아 떠난다. 그런데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 영화처럼 세속적 성공이 허망하다고 해보자. 아니, 그냥 세속적 성공은 정말 허망하다고 해보자. 그런데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극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여기서 사람들이 자주 제시하는 대안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세속적 성공이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만들어 내지 않는지 의심해봐야 한다. 한 술 더 떠 세속적 성공의 허망함을 물리치는, 대안적 삶이 어쩌면 세속적 성공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따라서 나는 일단 이런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ㄹ) 사회 적응은 사회 적응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사회적응을 넘어선 삶을 희미하게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삶이 정말 있다 해도 그것은 사회적응을 무력하게 만들만큼 강력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적응을 넘어선 삶은 사회 적응이 만들어낸 허상일지 모른다.

ㄹ)을 사회적응의 아포리아라고 불러보자. 사회적응의 아포리아를 파괴해야만 참된 윤리를 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적응의 아포리아에 갇혀있다.

포스 카인드

생각만들기 2010/03/02 00:00 lacan
4번째 부류 :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사람.

이런 영화를 보는 사람은 대체로 외계인 현상을 믿지 않는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외계인이 나타나서 사람을 납치했다고? 우리는 외계인을 믿기 어렵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니다. 증거는 많다. 단지 외계인이 불쾌하니까. 그런데 우리는 외계인을 보고하는 사람을 의심한다. 그들은 정말 어떤 것을 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환상이 아닐까?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달리 정신이 이상하니까. 그런 것이 보인다. 그들은 어쩌면 정신질환을 앓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쪽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ㄱ) 그들은 미쳤다. 그래서 그들은 외계인을 본 것이다. 그들이 본 외계인은 정신병의 증상이다.

ㄴ) 그들은 정말 외계인을 봤다. 외계인이 정말 그들을 납치했다.

아마 우리는 ㄱ)을 ㄴ)보다 선호할 것이다. 아무래도 정신병으로 설명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니까.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외계인이 정말 있다는 설명이 정말 깔끔하다. 외계인이 정말 있다면, 모든 것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ㄱ)은 다르다. 우리는 정신병이야 라고 딱지를 붙이지만, 정말 그것을 정신병의 증상으로 볼 수 있을까? 정신병이 원인이라고 우리는 쉽게 지적할 수 있다. 요점은 정신병의 증상이다. 우리는 정말 정신병이 이런 황당하고, 끔찍한 환상을 만들어 낸다고 믿나? 믿을 수 있다. 정신병이란 증상이 너무나 복잡하고 황당하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받아들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