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빠가 말하다.
ㄱ) 죽은 아빠는 산 자처럼 말할 수 없단다. 산 자는 어떻게 말할까? 산 자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산 자는 너에게 신중한 소비자가 되라고 말한다. 마치 너에게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네가 신중하게 선택했다면 너는 만족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죽은 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죽은 자는 종교를 파는 금융 상담가처럼 말할 수 없다. 죽은 자는 진리의 눈으로 말한다. 나도 그렇다. 죽은 자는 진리의 눈으로 말한단다.
ㄴ) 많은 사람이 너에게 종교를 말할 때 그들은 마치 금융 상담가처럼 말한단다. 너에게 선택 기회를 주고, 너에게 여러 가지 길을 보여주면서 너에게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금융 상담가는 너에게 무엇을 팔아야 할지 이미 결정했다. 금융 상담가는 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금융상담가에게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까. 재미있게도 너도 금융상담가가 이렇게 행동하리라 이미 예상한다. 그렇지? 여기서 너는 아마 진짜 진리?를 듣고 싶을 거야. 갑자기 금융상담가가 업계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진리를 말할 때 너는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할 거라고 믿지. 그렇지.
ㄷ)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자꾸나. 왜 종교계에 속한 사람은 진리를 말하지 않을까? 그들이 지금까지 숨겼던 비밀을 말하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너는 여전히 숨은 진리를 믿는구나. 그런 진리/진실이 숨어있다는 듯. 영화 <킥 애스>를 보면 주인공은 영웅이 되고 싶어해. 그런데 영웅짓이 부질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상하게 영웅 옷(망토 달린?)을 근사하게 차려입고 외출을 해. 영웅짓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잘 알지만 주인공은 영웅짓을 멈추지 않지. 이상하지. 영웅은 없지만 자신이 영웅이라고 믿지도 않지만, 그는 영웅처럼 행동해. 스파이더맨 같은 복장은 이상한 매력이 있어. => 복장은 주인공의 믿음을 압도하는 힘이 있지. 그래서 주인공은 믿는 사람처럼? 행동해.
ㄹ) 더욱 웃기는 일이 벌어져. 주인공은 영웅짓을 그만 두지 못해 거리로 나섰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 그들은 주인공처럼 가면을 쓰지만 그들은 정말 영웅이야. 주인공은 영웅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인공이 틀린거지. 영웅은 있어. 주인공이 흉내내던 영웅이 떡 하니 이 곳에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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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딸에게 기독교를.
아빠가 죽었다.
나는 죽었다.
1. 나는 죽었다. 너무 일찍 죽어서 상당히 억울하다. 딸은 이제 10살이 넘어서 한창 까불고 있는데. 난 죽어서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하다니. 너무 억울하지 않나. 그래서 딸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무엇이 확실한가? 명예? 부? 여자? 사랑? 이것 가운데 어떤 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쉽게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우연하다는 것을 마치 공리처럼 받아들인다. 공리까지 아니더라도 그냥 세상이 정말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면 종교적 신념은 어떤가? 그것은 오래 갈까? 세상의 지혜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것조차 그렇게 오래가지 않더라. 하지만 정작 죽어보니 사정이 달라진다. 죽음 뒤에 오는 세상은 이 세상만큼 우연할까? 확실하지 않을까?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죽은 후에 많은 것이 분명해진다고 한다.
2. 그래서 나는 죽은 자의 관점에서 종교를 말해보기로 했다. 나는 딸에게 인생 설계사?처럼 말하고 싶지 않다. 인생 설계사는 정말 좋은 말을 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선택은 당신이 하세요! 하지만 많은 것을 안 사람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죽은 후에 종교가 어떻게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해보니 설명방법을 바꾸고 싶다. 우리는 종교 메시지를 전할 때, 메시지의 진리에 몸을 담그고 전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마치 메시지가 저기 있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메시지를 바라보며 전할 수 있다. 과연 어느 입장에 설까?
3. 나는 죽은 자의 입장에서 딸에게 종교를 말해보고 싶다.
3-1. 영화 킥 애스 : 아버지와 딸의 이상한 관계. 나는 무엇을 원하나? 이 질문에 답하려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지 말자.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다면, 너의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한번 봐. 킥 애스에서 아버지는 딸에게 살인교육을 시킨다. 죽은 엄마를 위해 복수하자. 이것이 아빠의 인생 사명. 그래서 딸에게 살인교육을 시킨다. 엄마를 죽이고 가정을 파괴한 악당을 끝장내자! 이것이 아빠의 사명이다. 그런데 이런 사명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어떻게 딸에게, 성인이 되려면, 지금까지 산 만큼 살아야 할 어린아이에게 살인교육이라니. 하지만 딸이 더 웃긴다. 딸은 기꺼이 살인교육을 받으며 아빠가 원하는 인물이 된다. 너무 훌륭한 전사로 거듭난다. 아빠가 딸에게 얼마나 강력한 존재이길래. 딸이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욕망은 남(타인)과 관계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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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2 13:57
lacan
클로에 모레츠 면담 : 힛걸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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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6 22:57
lacan
이 사건도 결국 미네르바 사건과 비슷하게 진행된다. 한 마디로 "이 지랄할 줄 알았다"
어떤 젊은이가 생뚱맞은 선언을 하며 사회에 메시지를 던진다. 사람들은 감동한다. 어쩌면 저렇게 용기있으신지요... 그리고 그는 처음 선언으로 입은 충격을 사뿐히 건너뛰고 새롭게 얻은 명성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 제 2의 인생 시작. 인생을 상큼하게 개조하는 방법치곤 괜찮은 것 같다. 그렇지 않나?
당신도 사회에 충격적 메시지를 던질 이벤트를 한번 계획해보라. 그리고 과감히 몸을 던져보라. 처음에 조금 피곤하겠지만 당신은 새로 얻은 명성으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 한번 투자해보시길.
일단 오해 마시길. 각 사람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부자가 갑자기 가난해질 수 없다. 공부를 잘 하던 아이가 갑자기 공부를 못할 수 없다. 김예슬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김예슬은 진정성을 나는 인정한다.
단지 나는 이런 사건이 우리사회에 사뿐히 흡수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이 사건을 조금 더 뒤틀어 보겠다. 김예슬이 지방대에 편입하려고 고대를 자퇴했다고 상상해보자. 김예슬이 고대를 자퇴하면서 "고대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 난 이제부터 지방대간다. 고대 안녕..." 이렇게 대자보를 썼다고 해보자. 어떻게 됐을까? 지금처럼 명성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예슬 역시 감히? 지방대 갈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게다. ㅎㅎ 확 때려치우는 것은 처음 시선을 끌기에 좋다. 이상하게 그 효과는 쉽게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처음 시선을 끌기 어렵지만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걸 고민해보자.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이 감동?받았다고 하나.. 정말이지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감동이란?? 한심하다고 해야겠지.
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
예슬 (지은이) | 느
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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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예상일 : 지금 주문하면 내일 받을 수 있습니다.
저자 : 김예슬
- 최근작 : <김예슬 선언>
- 소개 : 2010년 3월 10일, 고려대학교
교정에 붙은 대자보 하나가 시대의 양심을 찔렀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의 대학 거부 선언! 그로부터 대한민국은 조용히, 그러나 크게 술렁였다. '김예슬 선언'은 MBC 9시뉴스와
경향신문 1면, 수많은 방송 및 칼럼을 통해 보도되었으며 각종 인터넷 포털의 메인에 떠올랐다. 수 백만 네티즌들은 잠 못 이루며
의견을 표명하고 댓글을 달며 슬픔과 분노의 마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대학과 사회 모순의 심장을 찌른 이 선언은 수많은 사람들을 멈춰 서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삶의 화두가 되었고,
래디컬한 그의 행동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거울이 되었다. 김예슬 선언은 저 거대한 '대학'과 '국가'와 '시장'이라는 억압의
3각동맹을 향해 던진 작은 돌멩이의 외침이었지만 이로부터 균열은 시작되었다. 아니 조용한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 김예슬은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1년 비평준화 마지막 세대로 소위 명문고라는 분당 서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열여덟 살에는 국제기구 활동가와 방송사 PD를 꿈꾸기도 했다.
- 2004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20년 동안 유보했던 수많은 물음을 품고 캠퍼스의 낭만을 꿈꾸며 대학에
들어갔지만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사라진 대학의 실상을 마주하면서 '대학은 무엇인가'를 고뇌하며 답을 찾아 나섰다. 친구의 소개로
청년들의 우정 어린 모임인 <대학생나눔문화>를 알게 되면서, 사회 불의에 저항하고 국경 너머 평화나눔을 실천하고 밤을
새워 고전을 읽고 토론하며 자유의 푸른 숨을 내쉬었다. 현재는 '생명·평화·나눔'을 기치로 내건 사회단체 <나눔문화>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나눔 농사터에 세워질 진정한 삶의 대학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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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6 09:30
lacan
한국에서 개성의 뜻이 사뭇 다르다. 나는 달라! 보통 이것을 개성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나는 달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개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에서 남이 좋다고 해야 개성을 인정받는다. 남이 좋다는 옷을 입고, 남이 좋다는 곳에 가고, 남이 좋다는 책을 읽고, 남이 좋다는 생각을 해야 개성있는 사람이다. 유행에 따르는 사람. 그가 개성있는 사람이다. 나는 남과 다르지만, 남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만큼 다르다. 한국에서 개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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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세상을 비난하기 쉽다. 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냐? 하지만 40대가 되면 달라진다. 세상을 비난한다고 세상이 내 말을 들어줄까? 무엇보다 내도 세상에 속해있다. 세상이 정말 꼴불견이라면 나도 한 몫하는 셈이다. 세상을 비난할 시간에 세상을 바꿀 궁리를 하는 것이 낫다.
이렇게 깨달으면 이제 내가 세상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게 된다. 내가 세상을 좋게 만들지 못한다면, 세상은 계속 꼴불견으로 보일 것이다. 나와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은 없다. 그런 세상이 있다면 세상을 실컷 욕하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되겠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없다. 세상이 부조리하다면, 바로 내도 조금은 부조리하다. 내가 세상과 맺은 관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세상을 비난해도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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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00:12
la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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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0 19:55
lacan
신 이론
: 현대 과학이 발견한 신과 창조의 비밀양장
버나드 헤이시 저/석 기용 역 | 책 세상 | 원서 : The
God Theory (2006)
신의 진화 : 종교와 과학, 문명과 문명 간의 화해는 가능한가?
로버트 라이트 저/허수진 역 | 동녘사이언스 | 200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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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는 신이 없다
데이비드 밀스 저/권 혁 역 |
돋 을새김 | 원서 : Atheist Universe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빅 터 J. 스텐저
저/김 미선 역 | 서 커스 | 원서 : GOD The Failed Hypoth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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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출간된 책을 보면서...
출판계가 진화론을 어떻게 대하는지 사람들은 알까? 잘 모르는 것 같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신간서적이 어떻게 등록되는지 아나? 아마 이것을 눈여겨 본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최근 <신이론>과
<우주에는 신이 없다>는 책이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예스24는 대체로 출간일을 기준으로 신간이 등록된 것 같다.
<신이론>을 신간목록에서 확인했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신이론>을 찾을 수 없었다. 몇 일후 알라딘에서
<우주에는 신이 없다>가 신간으로 등록되었다. 아마 4~5일 정도 지나서 <신이론>이 알라딘 신간으로
등록되었다. 그러면 <신이론>을 낸 출판사 책을 알라딘은 원래 늦게 소개하나? 그렇지도 않다. <신이론>을 낸
책세상은 작은 출판사도 아니다. 공교롭게도 <신이론>의 저자는 신을 인정하며 신이 과학에 통합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저자는 열정적 무신론자이다. 알라딘은 신간을 상당히 가려가면서 소개한다. 진화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문서적도 그렇다. 항상 특정 출판사 책이 먼저 소개된다. 신간소개가 출간일을 기준으로 소개된다고 믿는 독자는 내 말이
맞는지 한번 확인해보시길.
2. <그래서 어쩌라고> 이론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재미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창조론은 사실 서구 과학사/종교사에서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이것을
무시해버린다. 과학이 무엇인가요? 과학적 활동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이런 질문도 대체로 웃어 넘겨 버린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창조론이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어쩌라고?> 결국 그것은 과학이 아니잖아. 과학적 증거가
없는 이론이잖아! 역사나 환경이 무슨 상관이냐? 결국 과학이 맞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절차를 상당히
신봉한다. 이들은 과학이 특정한 절차에 따라 이뤄지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절차에 따라 가공된 지식은 옳다. 그 지식은
검증되었으니까. 따라서 과학은 어떤 역사나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과학이 영향을 받더라도 우리는 과학을 신뢰할 수 있다.
절차가 올바르게 진행되었다면.
일단 이렇게 생각하면, 사회학적, 역사적, 신학적 논의를 부수적 논의로 보기 쉽다.
절차를 제대로 따랐다면, 그렇게 가공된 지식은 분명 옳다. 혹은 근거가 있다. 따라서 다른 논의는 필요하지 않다. 그 지식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위해 다른 논의를 할 필요가 없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창조론의
역사나 신학은 흥미롭다. 하지만 진화론이 맞는지 과학이 결정한다. 그런데 과학이 확인했다. 따라서 진화론은 분명 맞을 것이다.
다른 논의는 필요하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창조론 논의를 이념적 난동으로 본다. 이미 과학에서 결판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학이 따르는 절차를 어떻게 믿느냐?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나는 이런 대답을 자주 듣는다. 믿을 필요가 없다. 과학적
절차를 왜 믿느냐! 그것은 특정한 규칙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사람이 실수로 절차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절차는
올바르다. 여기서도 절차는 완전히 객관적인 차원에 속한다. 절차를 올바로 수행했다면, 이론은 검증되었다는 뜻이다. (옳거나)
3.
계몽의 메타네러티브
최근 도킨스 논쟁에 관련된 무신론자는 대체로 계몽의 메타네러티브에 기댄다. 왜 계몽의
메타네러티브인가? 그는 늘 깨어나라고 소리친다. 종교라는 망상에서 깨어나세요!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저자는 세뇌설을
내세운다. 왜 많은 사람이 종교를 믿나? 교육을 통해 세뇌되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이상하게 냉전시대 반공주의와 비슷하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공산주의 국가에 맞서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퍼뜨렸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도 특정한 의견을 강요받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의 자율성과 권리를 존중한다. 학교에서도 특정 의견을 세뇌하지 않는다. 우리는 학교에서 여러 의견을 듣고
검토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성찰한 후 개인은 결정할 수 있다. 개인은 사상이나 이념을 받아들일지 결정할 수 있다. 교육은
이런 권리를 존중한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과 권리를 파괴한다. 그래서
개인은 선택할 수 없다.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하나의 이념을 강요한다.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자를 세뇌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념을 주입한다. 흥미롭게도 최근 무신론자는 이런 이야기를 다시 활용하는 것 같다. 냉전시대 이야기에서 공산주의가
맡던 역할을 이제 종교가 맡는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를 악의 축?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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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4 00:07
lacan
앞에서 나는 문제를 두 개 내놓았다. 먼저 교육문제를 파악할 때, 곧바로 문제를 논하지 말라. 누가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지 확인하라.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조사해보라. 당신이 그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상하게도? 그들은 당신이 거의 해결책을 내놓지 못할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입시제도가 문제라고 외친다. 입시제도가 문제라면 입시제도를 바꿔야 한다. 당신이 입시제도를 바꿀 수 있나? 당신은 입시제도를 바꿀 수 없다. 아마 대학교에서도 입시정책은 입시담당직원이 직접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당신이 해결책을 내놓지 못할 문제를 계속 제기한다.
이제 슬슬 당신도 의심이 들 것이다.
ㄱ) 그들은 교육문제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교육문제인가?
ㄴ) 그들이 지적한 문제가 정말 교육문제가 맞다고 하자. 그런데 내가 문제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나에게, 우리에게 교육문제를 말할까?
보통 교육문제를 논하는 사람은 여론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를 한다. 그들은 책을 써서 자기 뜻을 알리기도 한다. 그렇게 이름을 얻으면 그들은 집회나 강의에 등장한다. 그들이 대학교 강의에 초청을 받았다면 다시 신문에 등장할지 모른다. 그들이 쓴 책이 잘 팔렸다면, 그들은 다시 신문에 날지 모른다. 이렇게 그들은 여론에 영향을 준다. 그들이 스스로 여론을 만들기도 한다. 그들이 점점 이런 힘을 키운다면, 누가 그들과 접촉하고 싶어할까?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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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2 08:30
lacan
최근 재미난 체험 : 영국에 알렉스 칼리니코스라는 저명한 맑스주의 이론가가 있다. 페이스북에서 그를 검색했다. 그에게 쪽지를
보냈다.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친구 추가를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나를 받아줬다. 똑같이 다른 영국인에게 쪽지를
보냈다. 그는 영국에서 저명한 여성주의 신학자이다. 역시 먼저 쪽지를 보내 나를 소개하고 친구 추가를 부탁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보낸 쪽지를 아예 지워버렸다. ㅎㅎ 이것은 무슨 뜻일까? 사실 아무런 뜻이 없다. 칼리니코스는 아마 평소 습관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그는 국제 사회주의 계열의 맑스주의자로서 온라인을 국제적 연대를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따라서 온라인에서
낯선 외국인을 만나는 것은 칼리니코스에게 잘된 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온라인은 지인을 만나는 도구이다. 전혀 모르는 낯선
외국인을 온라인에서 상대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온라인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가지각색. 솔직히 나도 온라인 교제에
그다지 소망을 걸지 않는다. 자신이 사회적 영향력이 있을 때 온라인에서도 넓은 인맥을 구축할 수 있다. 자신에게 영향력이 없다면
온라인에서도 넓은 인맥을 구축하긴 어렵다. 더구나 내 나이에 무슨 온라인을 교제를 하겠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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