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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6 14:56
lacan
1. 최근 뇌과학이 유행이다. (물론 한국의 유행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출판사들이 주로 미국책 번역해서 내놓으라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온 세계가 뇌과학에 기뻐 날 뛸까? 당신도 잘 알듯이 유행은 곧 사그라든다.)
2. 정신 - 신체 논쟁이 다시 떠오른다. 뇌과학 때문인데, 뇌가 결국 전부?가 아니냐... 그런 얘기다. 따라서 정신이나 마음은 부수현상이란다. 뇌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정신/마음이란 뜻이다.
3. 이 논쟁의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럼 당신이 먼저 뇌가 없는 인간을 한번 생각해보라. 아마 당신은 그 인간을 인간으로 부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ㄱ) 인간을 정의하는 특징이 있다.
ㄴ) 그런 특징이 있어야 인간이다.
4. 아주 간단한 논증이다. 그러면 이제 육체를 살짝 바꿔보자. 육체가 완전히 인간과 다르다. 그런데 말과 태도, 행동이 정말 인간답다. 그럼 그것?은 인간인가?
ㄷ) 인간의 몸은 인간을 정의하는 특징인가?
5.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논점이 떠오른다. 이제 이렇게 상상해보라. 우리는 인간적 특징이 뇌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뇌를 들어내면 겉모습이 멀쩡해도 인간으로 보기 어렵다고 믿는다. 그러면 이제 인간의 기능이 온 몸으로 퍼져있다고 상상해보라. 인간 특징이 온 몸으로 퍼져 있으므로 인간 몸을 아무렇게나 변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 특징도 손상되니까. 이렇게 되면 '몸'이 인간을 정의하는 특징이 될까?
6. 그런데 아퀴나스는 뜻깊은 주장을 했다. 영혼과 몸이 결합해야 인간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몸과 분리된 영혼이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 반대로 영혼과 분리된 몸도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
또한 아퀴나스의 주장에 이런 뜻도 있다. 우리가 영혼을 과연 인지할 수 있을까? (몸과 분리된 영혼만 인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영혼을 관찰할 때, 우리는 이미 영혼과 몸이 결합된 존재로서 영혼을 관찰한다. 따라서 영혼만 관찰하기는 힘들 것이다.
영혼을 보여달라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영혼만 과연 볼 수 있을까? 몸과 영혼이 결합된 존재가 영혼만 관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영혼만 보여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실 영혼과 몸이 완전히 따로 존재하며, 영혼과 몸이 결합된 존재도 영혼을 관찰할 수 있다고 은근히 전제한다.
7. 그러면 다시 앞의 논증으로 돌아가 이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ㄹ) 인간의 특징이 뇌에 몰려 있는 경우
ㅁ) 인간의 특징이 온 몸에 퍼져 있는 경우.
두 가지 경우에, 과연 몸은 인간을 정의하는 특징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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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7 22:45
lacan
여러 곳에 제안을 했지만, 모두 거절 당했다. (걱정마시라. 연애는 아니니까.) 거절당하기 싫어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이해가 간다. 내가 제안을 하고 남이 거절을 할 때, 이 문제는 사업문제이다. 감정이 걸린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일단 거절을 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재미있다. 왜 기분이 좋지 않나? 그가 나를 나쁘게 평했나? 그가 나를 싫어하나? 그렇지 않다. 단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다. 사업을 따졌을 때. 하지만 어떤 사건은 미묘하게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습게도 어떤 사건이 나를 직접 기분 나쁘게 한 것이 아니다. 즉 상대가 나의 사업제안을 거절해서 기분이 나빠진 것이 아니다. 상대의 거절은 나에게 다른 사건을 기억나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이 무엇인지 모른다.
결국 화난 이유는 지금 내가 겪는 경험과 그다지 상관이 없는 셈이다. 현재 경험은 단지 어떤 기억을 더듬게 해주는 더듬이 역할을 한다. 사실 의학에서 이런 일도 있다고 한다. 가족이 꾸준히 방문하는 것보다 가족이 나를 돌본다는 생각이 훨씬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도 될까? 가족이 나를 직접 돌보지 않아도 내가 가족을 믿을 수 있다면, 내가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신을 생각해보자. 신도 그렇다. 신이 있다고 신자(신을 믿는 자가 당장 득을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을 믿으면서 신자는 스스로 뿌듯해한다. 신을 참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신이 당장 어떤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행복하다. Wunder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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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4 21:18
lacan
1. 누가 믿음을 강조하나?
어떤 사람은 무신론을 주장하며 증거와 논리를 강조한다.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보자. 우리는 친구를 사귀면서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런 사건이 정말 있었는지 의심스럽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재미있게도 많은 종교인은 증거와 논리 때문에 종교에 입문하지 않았다. 그냥 부모가 종교인이라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도 많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기에 교회에 다닌다.
우리는 왜 그렇게 증거와 논리를 강조할까? 마치 증거와 논리가 단단하면 어떤 주장을 수용할듯이. 너도 잘 알듯이 많은 사람이 증거와 논리와 상관없이 종교를 믿는다. 심지어 증거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종교를 믿는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이 적절할까? 사람들이 증거와 논리와 상관없이 종교를 믿는다면, 증거와 논리가 아니라 다른 요인을 찾아봐야 한다. 종교인을 탐구하려면, 종교적 신앙을 탐구하려면, 종교인이 실제로 어떻게 종교를 받아들이는지 봐야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종교인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조금 이상한 결론이 나올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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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23:39
lacan
1. 대구 시민은 승리했다
대구시 투표율을 봤다. 50%가 안된다. 만세. 대구 시민은 위대하게 승리했다. 아마 많은 분이 투표율을 걱정할 것이다. 이렇게 투표율이 적어서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겠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투표율이 낮아도 선거와 민주주의는 망하지 않는다. 선거는 여전히 뜻깊은 과정이다. 선거율이 낮아도.
선거로 시장과 구청장을 뽑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들이 정책을 잘 수행하는지 감시하고, 그들이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이다. 그렇지 않나? 시장이 시민에게 선거만 하고 나머지 일은 간섭하지 말라고 한다면, 아마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귀족정이다.
ㄱ) 선거로 정치한다.
ㄴ) 선거 말고 다른 방법으로 정치한다.
일단 두 개의 길이 모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선거하기 싫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또한 선거는 정당에게 큰 뜻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자. 정당은 당선자가 많을수록 힘을 낼 수 있다. 그래서 되도록 당선자를 많이 내려고 한다. 특히 군소정당은 투표하라고 강조한다. 투표율이 높아야 기존 판세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 반면 큰 정당은 투표를 강조하지 않는다. 투표율이 높아지면 기존 판세가 바뀔 수 있으니까. 한나라당은 투표 자체를 강조하지 않는다. 따라서 누가 선거를 강조하는지 가만히 보라. 정당이다. 시민은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선거하면 세상이 바뀐다? 이 말도 너무 믿지 말라. 평소에 시민이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선거를 잘 해도 소용이 없다. 평소에 내가 시장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시장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시장을 뽑아본들 무엇하겠나? 그런데 한국 정치를 잘 보시라. 선거는 강조하지만, 평소에 시민이 정치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거의 없다. 심지어 내가 정당을 만들지도 못한다. (법정 인원이 천 명이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천 명을 모으나? 정당 만들지 말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를 강조하다니. 진짜 중요한 문제를 말하지 않으려고 선거를 강조하는 것 같다. 그런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시민이 정치할 기회나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2. 국회의원 소환제보다 더 좋은 방법은...
국회의원을 소환할 권리를 보장하라? 그런데 이 제도는 생각보다 효과가 없다. 한국정치에서 이 제도가 어떻게 돌아갈지 한번 상상해보라. 국회의원을 소환할 권리를 지역구민에게 줬다고 해보라. 일단 이 법을 만드는 사람은 소환 조건을 제시할 것이다. 예를 들어 몇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서명이나 다른 방법으로 동의를 받아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소환도 힘들어진다. 수성구에서 몇 백명 이상 동의를 얻어야 소환할 수 있다고 해보자. 당신이 몇 백명의 동의를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길거리 서명? 이렇게 소환을 해도 문제다. 소환절차를 누가 감당할까? 주민 대표? 또한 국회의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사조직을 동원하여 미리 소환하지 못하게 방해할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쉽다. 국회의원은 지역구민보다 인원 동원력이 좋으므로 소환하자는 집단을 쉽게 방해할 수 있다. 이처럼 주민소환제는 생각보다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점수제는 어떨까? 숙제를 하도록 법으로 정해놓고, 숙제를 계속 하지 않는다면 자동 탈락되는 제도는 어떨까? 내가 볼 때 이것이 오히려 한국에 적합하다.
ㄷ) 국회의원은 지역구에서 정치신문을 발행한다.
ㄹ) 정치신문에는 지역구민의 의견이 가감없이 실린다.
ㅁ) 의견은 나름대로 논쟁을 거친다. 그러면 대체로 지지를 얻는 의견이 추려질 것이다.
=> 다음 아고라가 지역구마다 있다고 보면 된다. 정치신문(온라인,오프라인)에 글을 올리고 온라인으로도 글을 올린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의견을 낼 수 있다. 대신 의견수렴과정을 거친다. 당연히 여기에 온라인 논쟁, 지면 논쟁이 포함된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의견을 수렴한다. 이렇게 하면 대체로 지역구민에게 지지를 많이 받는 의견이 수렴될 것이다.
ㅂ) 온라인 논쟁, 지면 논쟁, 설문조사를 거쳐 지역구민의 의견을 수렴한다.
ㅅ) 이렇게 수렴된 의견을 국회의원은 반드시 국회활동에 반영해야 한다. (법안 제안 ...)
=> 국회활동을 정기적으로 보고한다. => 정치신문과 온라인으로 보고하고, 이런 활동을 지역민은 온라인과 정치신문으로 검색할 수 있다.
ㅇ) 이런 활동을 일년에 몇 회 이상 하지 않을 때, 국회의원은 자동으로 벌점을 받는다.
=> 국회의원의 벌점 역시 지역구민은 검색할 수 있다. / 벌점기록은 자동화하여 기한과 횟수를 지키지 않을 때 자동으로 벌점이 기록된다.
ㅈ) 벌점에 따라 국회의원은 다양한 제약을 받는다. 심지어 재선 자격이 박탈되거나 의원직이 정지되기도 한다.
=> 일단 이 제도의 장점은 분명하다. 내 의견을 정말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국회의원의 권한을 시민이 실제로 제어할 수 있다.
**반론을 살펴보자.
** 정치신문을 누가 보겠느냐? => 정치신문을 독자적으로 발행하는 것이 어렵다면, 지역신문과 일반신문을 이용해도 된다. 정치신문은 국가보조금으로 운영하기에, 지역신문과 일반신문에 인쇄비를 지급하고 특별 보급판으로 지역별로 지역신문과 함께 발행할 수 있다. 마치 현재 일반신문이 섹션면처럼 발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정치신문 인지도 높이기는 어렵지 않게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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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0/06/02 08:39
lacan
불평
1. 불평하다 망한 사람.
1-1. 기독교 없이 지내다니 뭔가 허전하지 않아. 노처녀?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면 노처녀는 어떤 고민을 할까? 노처녀는 성에 관심이 생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노처녀를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더라. 그리고 노처녀를 사회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노처녀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2. 재미있는 질문 : 기독교인은 이미 무엇을 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은 무엇을 모른다. 그러면 비기독교인은 어떤 고민을 할까?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기독교인이 누리는 향락이 있다. 그 향락은 상당히 은밀하고 달콤하다. 많은 사람이 이런 향락을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누리지 못한다. 바로 어떤 선을 넘지 않았으니까. 즉 만나지 않았으니까. 넘지 못하는 거야.
ㄱ) 기독교는 어떤 향락을 줄까?
ㄴ) 그 향락을 누리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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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
2010/06/01 09:17
lacan
상징적 등록/기록
남편과 이혼하고 싶지만, 돈 벌기 귀찮아서 그냥 산다. 이런 질문을 주부에게 했더니 71%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실 질문을 일부러 매운 고추처럼 만든 것 같다. 남편만큼 돈을 벌 수 없어서 그냥 산다라고 했어도 많은 사람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면 여자가 남편만큼 경제력이 있다면 쉽게 이혼할까? 우리는 삶의 변화가 어떤 뜻이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혼은 경제 문제이지만 상징적 등록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혼한다면 일단 이혼녀/남이란 이름이 따라다니게 된다. 이것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왜 부담스러울까? 보통 이혼녀/남은 설명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왜 이혼했느냐? 남에게 도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왜 결혼했느냐는 질문에도 대답하기 어려운데. 여기서 다시 짖궂게 물어보자. 왜 설명하기 어려운가? 이처럼 상징적 등록을 본인이 떠맡게 되면 상당히 어렵다. 학교에 들어가거나 회사에 들어가면 일단 이런 부담이 줄어든다. 자기를 남에게 설명해야 할 부담이 줄어든다. 자신의 존재가 회사나 학교에 등록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굳이 캐묻지 않는다. 가족도 그렇다. 일단 가족이 있고 아이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묻지 않는다. 반면 가족을 떠난 사람은 자기를 어디에 등록해야 할지 고민한다.
대리언 리더가 지적하듯이 상징적 등록을 제대로 못할 때 건강이 위태로워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영화가 윔블던이다. 윔블던에서 남자 주인공은 곧 테니스 계에서 은퇴하려고 한다. 영화 초반부에서 남자 주인공은 이미 테니스 코트의 강사가 되겠다고 사장과 계약을 한다. 그는 곧 프로 테니스계에서 은퇴한다. 다시 상징적 등록의 문제가 떠오른다. 주인공은 상징적 등록의 문제를 이렇게 표현한다. " 저 공이 계속 나를 피해간다면, 나는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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