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명박 대통령을 탐구한다면.
이명박 대통령을 탐구한다고 해보자. 과연 어떤 자료를 사용해야 그의 의도(혹은 행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사용한다고 해보자. 아마 그는 이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이 대통령의 의도와 행동을 해명하는 배경이라고 일단 가정한다. 이 대통령이 정말 기독교를 믿는가? 이 문제는 그의 가정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대통령은 기독교를 정말 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 신념이 이 대통령의 의도와 행동을 적절하게 해명한다면, 기독교적 신념은 이 대통령의 행적을 해명하는 배경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대통령이 기독교적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해도 된다.
라이트도 대체로 이런 논리로 제2 성전 유대교를 예수의 의도(행동)를 이해하는 배경으로 삼는다. 제2성전 유대교가 예수의 의도를 적절히 설명한다면, 예수가 제2성전 유대교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다.
2.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
예수는 메시야이다. 그런데 예수는 마지막, 궁극적 메시야이다. 이것이 라이트의 결론이다. 보통 이 결론을 유대 종말론으로 다시 해석하는 분이 많다. 예수가 마지막, 궁극적 메시야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첫 열매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라이트의 주장을 올바로 풀이하지 못했다. 라이트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승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승리를 "다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예수 이후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거나 "건설"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미/아직이란 종말론으로 예수사역을 이해하면, 예수의 메시야 사역은 그만큼 힘을 잃고 만다. 왜 그럴까? 이미/아직을 가정하면, 예수의 사역도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즉 새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와야만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아직 종말론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 예수가 아닌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아주 간단하게 물어보자. 예수가 왜 두 번 와야 하나? 왜 첫 번째 사역은 충분하지 못했나? 이미/아직 종말론이 이 문제를 시원스레 해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아직 종말론은 신약성서와 잘 들어맞는다. 복음서와 서신서 다음에 요한계시록이 있기 때문이다.
** 이미/아직 종말론으로 라이트를 해석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기대(expectation)가 되어야 한다.
라이트에 대한 나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참 메시야, 궁극적 메시야는 이미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궁극적 회복을 기다리지 않는다. 궁극적 회복은 이미 예수가 우리에게 가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이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간단하다.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일단 이런 해석은 예수의 메시야됨을 확실히 해명한다. 반면 이미/아직 종말론은 마지막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려야 하기에 예수의 메시야됨은 그 때까지 계속 모호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통치를 메시야 예수가 없어도 조금은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 사랑은 예수 없이도 조금은 실현된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해방신학자는 하나님의 통치와 메시야 예수를 연결시키는데 애를 먹는다.
그렇다면 나의 해석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예수가 참 메시야이며, 예수가 하나님의 승리라면,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되나? 나의 해석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를 다루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결정적" 때를 다룬다. 즉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결정적" 때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해석도 이미/아직 종말론과 만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아직 종말론은 요한계시록이 마지막 때를 다룬다고 보지만, 나는 결정적 때를 다룬다고 본다.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때"를 다르게 정의한다.
3. 예수가 참 메시야라면,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오래된 갈등도 풀린다. 예수가 참 메시야라는 선언은 신학적, 정치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메시야는 세속 정치에서도 단골손님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메시야의 때이며, 혁명세력에게 혁명의 때가 메시야의 때이다. 이런 식으로 메시야를 모방하고 흉내내는 이념은 상당히 흔하다. (최근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론도 똑같다.)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승리라면, 이런 메시야는 궁극적 메시야가 아니다. (이런 메시야가 모두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승리는 예수를 통해 완성되었으므로 예수의 제자는 무엇을 다시 실현하기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알린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는 제자 공동체에서 정말 실행된다. 여기서 제자 공동체가 아닌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행되지 않는다고 반문할 수 있다. 예수 이후에 하나님의 통치에서 배제된 영역은 없다고 해야한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영역도 없어졌다. (바울이 예수를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리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의 제자는 바로 예수에게서 완성된 하나님의 통치를 본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는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전하는 것이다. ( 여기서 예수의 유일성 문제도 풀린다. 예수의 의도와 행적이 특이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실현했으며, 하나님도 그 사실을 승인했으므로 예수는 독특하다. 하지만 유비적으로 예수의 사역을 실행한 이들의 공적도 인정된다. 이들의 공적을 인정한다고 예수의 유일성이 훼손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을 탐구한다고 해보자. 과연 어떤 자료를 사용해야 그의 의도(혹은 행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사용한다고 해보자. 아마 그는 이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이 대통령의 의도와 행동을 해명하는 배경이라고 일단 가정한다. 이 대통령이 정말 기독교를 믿는가? 이 문제는 그의 가정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대통령은 기독교를 정말 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 신념이 이 대통령의 의도와 행동을 적절하게 해명한다면, 기독교적 신념은 이 대통령의 행적을 해명하는 배경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대통령이 기독교적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해도 된다.
라이트도 대체로 이런 논리로 제2 성전 유대교를 예수의 의도(행동)를 이해하는 배경으로 삼는다. 제2성전 유대교가 예수의 의도를 적절히 설명한다면, 예수가 제2성전 유대교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다.
2.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
예수는 메시야이다. 그런데 예수는 마지막, 궁극적 메시야이다. 이것이 라이트의 결론이다. 보통 이 결론을 유대 종말론으로 다시 해석하는 분이 많다. 예수가 마지막, 궁극적 메시야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첫 열매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라이트의 주장을 올바로 풀이하지 못했다. 라이트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승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승리를 "다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예수 이후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거나 "건설"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미/아직이란 종말론으로 예수사역을 이해하면, 예수의 메시야 사역은 그만큼 힘을 잃고 만다. 왜 그럴까? 이미/아직을 가정하면, 예수의 사역도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즉 새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와야만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아직 종말론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 예수가 아닌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아주 간단하게 물어보자. 예수가 왜 두 번 와야 하나? 왜 첫 번째 사역은 충분하지 못했나? 이미/아직 종말론이 이 문제를 시원스레 해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아직 종말론은 신약성서와 잘 들어맞는다. 복음서와 서신서 다음에 요한계시록이 있기 때문이다.
** 이미/아직 종말론으로 라이트를 해석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기대(expectation)가 되어야 한다.
라이트에 대한 나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참 메시야, 궁극적 메시야는 이미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궁극적 회복을 기다리지 않는다. 궁극적 회복은 이미 예수가 우리에게 가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이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간단하다.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일단 이런 해석은 예수의 메시야됨을 확실히 해명한다. 반면 이미/아직 종말론은 마지막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려야 하기에 예수의 메시야됨은 그 때까지 계속 모호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통치를 메시야 예수가 없어도 조금은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 사랑은 예수 없이도 조금은 실현된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해방신학자는 하나님의 통치와 메시야 예수를 연결시키는데 애를 먹는다.
그렇다면 나의 해석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예수가 참 메시야이며, 예수가 하나님의 승리라면,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되나? 나의 해석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를 다루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결정적" 때를 다룬다. 즉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결정적" 때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해석도 이미/아직 종말론과 만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아직 종말론은 요한계시록이 마지막 때를 다룬다고 보지만, 나는 결정적 때를 다룬다고 본다.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때"를 다르게 정의한다.
3. 예수가 참 메시야라면,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오래된 갈등도 풀린다. 예수가 참 메시야라는 선언은 신학적, 정치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메시야는 세속 정치에서도 단골손님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메시야의 때이며, 혁명세력에게 혁명의 때가 메시야의 때이다. 이런 식으로 메시야를 모방하고 흉내내는 이념은 상당히 흔하다. (최근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론도 똑같다.)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승리라면, 이런 메시야는 궁극적 메시야가 아니다. (이런 메시야가 모두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승리는 예수를 통해 완성되었으므로 예수의 제자는 무엇을 다시 실현하기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알린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는 제자 공동체에서 정말 실행된다. 여기서 제자 공동체가 아닌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행되지 않는다고 반문할 수 있다. 예수 이후에 하나님의 통치에서 배제된 영역은 없다고 해야한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영역도 없어졌다. (바울이 예수를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리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의 제자는 바로 예수에게서 완성된 하나님의 통치를 본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는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전하는 것이다. ( 여기서 예수의 유일성 문제도 풀린다. 예수의 의도와 행적이 특이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실현했으며, 하나님도 그 사실을 승인했으므로 예수는 독특하다. 하지만 유비적으로 예수의 사역을 실행한 이들의 공적도 인정된다. 이들의 공적을 인정한다고 예수의 유일성이 훼손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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