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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4/26 lacan 죽은 아빠와 대화하다(2)
  3. 2010/04/23 lacan 죽은 아빠와 대화하다(1)
  4. 2010/04/15 lacan 책임있게 살기?
  5. 2009/12/11 lacan 밀뱅크 : 여성주의와 가족(가디언 논설)
  6. 2009/01/15 lacan 신약성서 최고의 질문과 답: 박삼종(2)
  7. 2008/07/03 lacan 인간적인 "그러나" 인간적인
  8. 2008/02/17 cogitur 그러므로, 이제
  9. 2008/02/15 lacan 새로운 시작 (2)
편견 : 그렇다면 사람들은 기독교를, 혹은 종교를 어떻게 보나?

ㄱ) 사람은 원래 종교를 믿지 않는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을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종교를 듣게 된다. 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때부터 종교를 믿게 된다. 혹은 신을 믿게 된다.

ㄴ) 이렇게 스스로 신을 믿었다면, 스스로 신을 부정할 수 있다.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신을 믿는 것은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 스스로 선택을 해서 믿게 된 것이니까.

ㄷ) 믿는 사람은 이상하게 편파적이다. 예를 들어 애인을 옹호하는 사람은 애인의 잘못을 좀처럼 들춰내지 않는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종교의 잘못을 좀처럼 들춰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종교를 이렇게 평가한다면, 우리는 종교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교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힘들다. 특히 기독교를 이렇게 사고한다면, 그는 기독교를 쉽게 오해하고 말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정민(가명)아. 기독교를 기초로 삼아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네가 정말 기독교에 입문하려면 이렇게 시각을 완전히 바꿔야 한단다. 세상이 기독교를 보는대로 네가 기독교를 본다면, 기독교는 너에게 보이지 않을 거야. 기독교가 세상을 보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봐봐. 그래야 기독교가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 "보일거야"


죽은 아빠가 말하다.

ㄱ) 죽은 아빠는 산 자처럼 말할 수 없단다. 산 자는 어떻게 말할까? 산 자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산 자는 너에게 신중한 소비자가 되라고 말한다. 마치 너에게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네가 신중하게 선택했다면 너는 만족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죽은 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죽은 자는 종교를 파는 금융 상담가처럼 말할 수 없다. 죽은 자는 진리의 눈으로 말한다. 나도 그렇다. 죽은 자는 진리의 눈으로 말한단다.

ㄴ) 많은 사람이 너에게 종교를 말할 때 그들은 마치 금융 상담가처럼 말한단다. 너에게 선택 기회를 주고, 너에게 여러 가지 길을 보여주면서 너에게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금융 상담가는 너에게 무엇을 팔아야 할지 이미 결정했다. 금융 상담가는 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금융상담가에게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까. 재미있게도 너도 금융상담가가 이렇게 행동하리라 이미 예상한다. 그렇지? 여기서 너는 아마 진짜 진리?를 듣고 싶을 거야. 갑자기 금융상담가가 업계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진리를 말할 때 너는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할 거라고 믿지. 그렇지.


ㄷ)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자꾸나. 왜 종교계에 속한 사람은 진리를 말하지 않을까? 그들이 지금까지 숨겼던 비밀을 말하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너는 여전히 숨은 진리를 믿는구나. 그런 진리/진실이 숨어있다는 듯. 영화 <킥 애스>를 보면 주인공은 영웅이 되고 싶어해. 그런데 영웅짓이 부질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상하게 영웅 옷(망토 달린?)을 근사하게 차려입고 외출을 해. 영웅짓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잘 알지만 주인공은 영웅짓을 멈추지 않지. 이상하지. 영웅은 없지만 자신이 영웅이라고 믿지도 않지만, 그는 영웅처럼 행동해. 스파이더맨 같은 복장은 이상한 매력이 있어. => 복장은 주인공의 믿음을 압도하는 힘이 있지. 그래서 주인공은 믿는 사람처럼? 행동해.


ㄹ) 더욱 웃기는 일이 벌어져. 주인공은 영웅짓을 그만 두지 못해 거리로 나섰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 그들은 주인공처럼 가면을 쓰지만 그들은 정말 영웅이야. 주인공은 영웅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인공이 틀린거지. 영웅은 있어. 주인공이 흉내내던 영웅이 떡 하니 이 곳에 있는거지.
어린 딸에게 기독교를.

아빠가 죽었다.
나는 죽었다.

1. 나는 죽었다. 너무 일찍 죽어서 상당히 억울하다. 딸은 이제 10살이 넘어서 한창 까불고 있는데. 난 죽어서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하다니. 너무 억울하지 않나. 그래서 딸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무엇이 확실한가? 명예? 부? 여자? 사랑? 이것 가운데 어떤 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쉽게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우연하다는 것을 마치 공리처럼 받아들인다. 공리까지 아니더라도 그냥 세상이 정말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면 종교적 신념은 어떤가? 그것은 오래 갈까? 세상의 지혜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것조차 그렇게 오래가지 않더라. 하지만 정작 죽어보니 사정이 달라진다. 죽음 뒤에 오는 세상은 이 세상만큼 우연할까? 확실하지 않을까?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죽은 후에 많은 것이 분명해진다고 한다.

2. 그래서 나는 죽은 자의 관점에서 종교를 말해보기로 했다. 나는 딸에게 인생 설계사?처럼 말하고 싶지 않다. 인생 설계사는 정말 좋은 말을 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선택은 당신이 하세요! 하지만 많은 것을 안 사람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죽은 후에 종교가 어떻게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해보니 설명방법을 바꾸고 싶다. 우리는 종교 메시지를 전할 때, 메시지의 진리에 몸을 담그고 전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마치 메시지가 저기 있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메시지를 바라보며 전할 수 있다. 과연 어느 입장에 설까?

3. 나는 죽은 자의 입장에서 딸에게 종교를 말해보고 싶다.

3-1. 영화 킥 애스 : 아버지와 딸의 이상한 관계. 나는 무엇을 원하나? 이 질문에 답하려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지 말자.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다면, 너의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한번 봐. 킥 애스에서 아버지는 딸에게 살인교육을 시킨다. 죽은 엄마를 위해 복수하자. 이것이 아빠의 인생 사명. 그래서 딸에게 살인교육을 시킨다. 엄마를 죽이고 가정을 파괴한 악당을 끝장내자! 이것이 아빠의 사명이다. 그런데 이런 사명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어떻게 딸에게, 성인이 되려면, 지금까지 산 만큼 살아야 할 어린아이에게 살인교육이라니. 하지만 딸이 더 웃긴다. 딸은 기꺼이 살인교육을 받으며 아빠가 원하는 인물이 된다. 너무 훌륭한 전사로 거듭난다. 아빠가 딸에게 얼마나 강력한 존재이길래. 딸이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욕망은 남(타인)과 관계있다는 얘기.

책임있게 살기?

거룩한가르침 2010/04/15 18:41 lacan
20대는 세상을 비난하기 쉽다. 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냐? 하지만 40대가 되면 달라진다. 세상을 비난한다고 세상이 내 말을 들어줄까? 무엇보다 내도 세상에 속해있다. 세상이 정말 꼴불견이라면 나도 한 몫하는 셈이다. 세상을 비난할 시간에 세상을 바꿀 궁리를 하는 것이 낫다.

이렇게 깨달으면 이제 내가 세상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게 된다. 내가 세상을 좋게 만들지 못한다면, 세상은 계속 꼴불견으로 보일 것이다. 나와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은 없다. 그런 세상이 있다면 세상을 실컷 욕하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되겠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없다. 세상이 부조리하다면, 바로 내도 조금은 부조리하다. 내가 세상과 맺은 관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세상을 비난해도 소용없다.

For feminism and family

We need a radical feminism that ends women's enslavement and allows them to be neither subordinate nor men writ large

Today, the defence of the family is seen as a rightwing cause. Conversely, liberal feminism is seen as a leftwing cause. But these associations are questionable.

In both cases, a liberal left unconcerned with notions of intrinsic good "conservatively" sanctifies existing tendencies. Thus Deborah Orr cites the fact that women, like men, were once made wage-slaves as if this were a good thing. She also cites the fact that today middle class women tend to have babies late as if this were a sign of the rise of freedom. Meanwhile she contends against David Cameron that "the days of the typical family are numbered".

But it is not the case that a mere fact can generate a value. While women have always worked, industrial capitalism pressured them into forms of work that interfered with their partly desired domestic roles. Campaigns for a male "living wage" were in consequence campaigns supported in the past both by the left and by women. If today the middle class have babies late, then that is more the result of competitive market pressures and the market promotion of youth culture than of any supposed liberation of "free choice". As to family decline, this occurs because an overbearing market and state deal directly with the individual, beginning at the youngest age possible. The family is being undermined for the same reason that unions, mutuals and churches have been undermined: because these are voluntary associations that combine self-help and education with a democratic sharing of resources.

The family is the one institution of primitive participatory community that still survives. It involves the equal sharing of goods. Authority within the family is not necessarily patriarchal and aims self-denyingly at reciprocity. In these ways the family offers uniquely a training in mutual nurture. Of course it is the worst source of pathologies, but only because it is the strongest source of psychic health.

Of course also, there can be "unconventional" families which should not be penalised. But all families aim for fidelity and stability, and this very aim favours a social and political bias towards marriage rather than cohabitation. For commitment in time requires more than an endless reserve as to what one may think tomorrow, which causes "partners" to face an intolerable continuously renewed judgement from each other. Marriage suspends sexual competition and distributes sexual partners equally. It still today usually protects women physically and compensates for their lesser muscular strength.

In the case of liberal feminism, the left has shied away from the fact that its success has coincided with a regressive era that has involved an increase in economic inequality and a decline of civil liberties while covertly compensating sexual liberties. The archetypal female subject today is in one way a male capitalist subject writ large, as it is seen as autonomous in relation to biological reproduction as well as economic production. At the same time it remains a traditional "female" subject defined by private concerns now become consumeristic.

The downside of this hybrid female subjectivity is the continued enslavement of women in both workplace and home and the loss of a male code of honour as to the assistance of women and children, which has had devastating consequences for the working class. All this combines with an increased state and market control of reproduction which amounts to a new general rule of men over women.

Instead of this we need a true radical feminism more focused on the question of what constitutes good relations between women and men. This needs to include mutual equity concerning procreation and above all equal rights to the combining of work and child nurture without economic loss. In cultural terms we need women to play a public role neither as subordinate, nor as men writ large.

Such a feminism would promote the family as the first school of association and of resistance to the depravations of both market and state.

질문: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놀라운 체험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도대체 어디서 예수에 대한 정보를 얻었나요? 체험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지식이 생겨 예수를 잘 알게 되지는 않을 텐데요.

http://lacancenter.org/lacan/attachment/1880862934.mp3

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살림


1. 왜 선하게 살지 못하나?

학원 발가벗기기 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마 중,고등학생이라면 반드시 "암기"하시라.

"이 책을 읽을 만큼 공부에 관심있는 학생이라면 다짐과 실천, 포기를 셀 수 없이 반복하면서 공부해왔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든 학원이든 과외든 수업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공부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학원을 바꾸고, 최고 강사를 찾아다니고, 공부장소를 바꾸고, 학습법을 읽어봤지만 소용이 없다. 성적이 안 오른다. 왜? 의지가 약해서 혹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아니다. 학습을 내 것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공부방법"을 몰라서 그렇다. 그것을 모른 채 공부하니까 힘만 들고 결과는 보잘 것 없다.


당신은 이 말에 동의하나? 놀랍게도 이 궁극적 해결책은 신학적 울림이 있다. 기독교인은 오래동안 선한 삶을 위해 노력했다. 예수를 믿었다면 그것을 끝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의 짐을 지고, 평화를 이루고... 기독교인은 잘 안다. 하지만 "안된다." 왜 이것이 잘 안될까? 왜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행할까?

1) 의지가 약하다.
2) 악의 유혹을 이기기 힘들다.
3) 사탄이 선행을 막는다.


위 인용문을 보면, 세 가지 모두 답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선을 "내 것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을 알지만 제대로 행하지 못했다. 멋져요!! 이로써 진중한 신학적 문제가 풀렸다. 선을 내 것을 만드는 법을 알아라. 그러면 당신은 진짜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의 저자도 똑같이 말한다. 선을 습관적으로 행하라. 그러면 당신은 선한 삶을 살 수 있다. 물론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선이 "내 몸에" 들어 앉아야 한다.


2. 도덕 역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매우 이상한 세계에서 산다. 보통 기독교인을 비판할 때, 겉과 속을 비교한다. 겉으로 고상하지만, 속으로 타락했다. 겉으로 기독교인으로 사랑을 외치지만, 사실 성도를 강간했다... 정말 사정이 이렇다면, 차라리 답은 간단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마 진짜 기독교인이 아닐게다. 아니면 기독교가 그런 위선을 부추기거나.

그런데 겉으로 타락했지만, 속은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이 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빌 게이츠를 보자. 그는 "냉정한" 자본주의 옹호자이다. 그런데 은퇴하면서 자선사업을 하겠단다. 성공한 기독교인을 보자. 그는 누가 보더라도 성공했다. 세속적 기준으로 따져도 그렇다. 그런데 그는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그의 종교심에 거짓이 없다.

예전에 거리에서 잠시 격투기 프로를 봤다. 어떤 선수가 나와서 면담을 한다. 그는  곧 자기와 경기를 할 상대선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 친구고 경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친구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나는 너를 이길 것이다. 아주 냉정하게 너를 물리칠 것이다.'
 
여기서 그가 우정을 잘못 이해했을까? 아니면 우정과 승부는 다르다고 믿는가? 그에게 우정은 오히려 승부욕을 직접 부추긴다. 우정을 강할수록 승부욕도 불탄다. 우정은 승부욕을 지피는 기름과 같다. 기독교 신앙이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성공한 기독교인은 기독교를 정확하게 이해한다. 그가 신앙에 집착할수록, 신앙대로 행할수록 성공한다. 즉 기독교신앙은 성공의 연료다.


3. 훈련과 성공.

사실 이것은 황당하게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 성공한 사람은 엄격한 훈련을 권한다. 우리는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훈련된 사람이 정말 성공한다. 중간에 흔들리거나 유혹에 굴복하면 성공은 없다. 따라서 성공하려면,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즉 선을 내 것으로 만드는 법을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인은 선을 안다. 성경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안다. 그것을 열심히 학습하고 그것대로 실천하자. 그러면 선한 삶과 함께 성공도 따라온다. 얼마나 좋은가?

4. 그런데 성공은...

이름만 들으면 누군지 잘 아는 교수에게 나는 성공의 비법을 들었다. 자기에게 집중하라. 맡은 일에 충실하라. 자신을 믿어라. 비전과 목표를 세워라.... 사실 이렇게 하려면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 의지만 있다고 되지 않는다. 즉 이런 규칙을 "내 것으로 만들어" 습관처럼 행해야 한다. 그러면 성공할 수 있다.

여기서 매우 묘한 상황이 펼쳐진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이 선한 삶을 살 때, 선한 삶을 위해, 연습할 때 그는 고통을 겪을지 모른다. 결과도 신통치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분은 분명하게 강조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즉 선한 삶을 위한 연습/노력은 좋은 결과를 낸다. 성공, 행복을 가져온다. 물론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 물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거룩한가르침 2008/02/17 01:08 cogitur

8 Οὐδὲν ἄρα νῦν κατάκριμα τοῖ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Aland, B., Aland, K., Black, M., Martini, C. M., Metzger, B. M., & Wikgren, A. (1993, c1979). The Greek New Testament (4th ed.) (422). Federal Republic of Germany: United Bible Societies.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nihil ergo nunc damnationis est his qui sunt in Christo Iesu qui non secundum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제인 숭례문이 무엇인가 불만이 가득한 한 사람의 방화로 불에 탔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제상을 차리고 절하며 무엇인가 불안하고 두려운지 잘못을 빌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달래는 모양인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전 이 제사에 돈을 가지고 간 사람들이 경찰 조사를 받았고 기와 한 장에 백만원을 호가한다는 에피소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하나 같이 남대문에 우리가 몹쓸짓, 잘못을 했고, 잘못을 빌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항상 정죄감 속에 살고, 실상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대문 신을 달래려고 자발적으로 제밥을 사고 시간을 내어 달려갑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사고패턴/행동패턴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게 21세기 최첨단 인터넷이 발달한 나라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어느 문화에서나 그 모양이 어떻하든지 이 법이 주는 정죄의 문제는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 이 문제를 깊게 다루었던 바울의 로마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이 롬 7:6에서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어 매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문자, 의문,  율법의 유죄청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이전에는 왜 이 율법의 정죄, 곧 유죄 판결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요?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면 선한 율법이 인간의 죄성과 만나 마귀적인 무한 반복의 죄의 순환고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은 법 Lexsis, Loi, nomos/금지를 만나면 더욱더 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되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 하고 싶은 역설적인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금지는 더욱 욕망을 크게 만들어 결국 욕망을 충족시키는 죄를 실행하게 하고 정죄에 빠지게 합니다. 이 법-금지-욕망-죄-정죄-법의 무한반복을 영, 곧 마음의 심비에 법이 새겨지지 않은 사람은 결코 벗어날 수 없고 육체 가운데 죄가 더욱 강해져만 간다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어떻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까요? 바울은 우리의 죄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죄를 범했을 때 다시 율법을 생각하고 정죄-곧 유죄판결을 받고 괴로와 하게 되는데, 바울은 이 지점에서 십자가라는 양날 선 검을 찔러 넣습니다.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의 유죄판결을 개선하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도 말고, 왜 내 인생은 이러나 하고 자기 연민에도, 절망에도 빠지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위선의 가면-persona를 벗고 죄에 대하여 죽으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인간적인 시도, 사고의 습관(Habitus)을 즉각 멈추고, 죄인인 나에 대한 사망 선고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무엇인가를 내가 해야 하다고 끊임없이 내게 속삭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내가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것을 멈추라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이 방법이 옳은 방법일까요? 바울은 한가지 비유를 더 듭니다. 결혼의 비유인데,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남자를 사랑해서 남편과 결혼했는데, 점차 이것저것 까다롭게 요구했습니다. 기준에 조금이라도 못미치면 “반찬이 왜 이래” 점잖케 핀잔을 주곤 했습니다. 점점 이 부인은 지쳐갑니다. 나중에 남편에 분노하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죽어서 새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남편은 결코 먼저 요구하는 법이 없습니다. 먼저 칭찬하고 밥을 먹고 사소한 것, 작은 것에도 감사했습니다. 이 부인은 신이 나서 점점 더 잘 섬기기 시작했고 어느 사이에 전 남편이 정말 까다롭게 요구하던 죽기보다 하기 싫었던 일보다 더한 일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남편을 위해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남편은 누구이고 둘째 남편은 누굴까요? 네, 첫 남편은 율법이고, 두 번째 남편은 은혜입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옛 남편이 죽고 사랑하는 남편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지 않으면? 네, 내가 죽고 다시 살아야 새로운 신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았다는 객관적인 사실, fact를 알라고 바울 사도는 부탁합니다. 이것이 본래 로마서에서 바울이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 고후 5:17 말씀처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롬 7:6에서 바울이 이야기한대로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어 매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제 은혜의 선순환 고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관계 가운데 들어온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먼저 우리에게는 보혜사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도우시는 분 안에서 처음에는 희망이 넘치고 날아갈 듯하지만 금방 다시 마귀의 죄의 속임수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해결 방법은 있습니다. 새로운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의 비밀이 여기 로마서 8장 1절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정사와 권세 아래 살아가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낀 긴장이 팽팽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여전히 약함을 지닌 우리 자신은 죄의 유혹 아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현재로 만나지 못하고 과거의 실패에 사로잡혀 살거나 미래의 비현실적인 꿈 속을 헤메게 됩니다. 죄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은혜로 충만한 현재ㅡ 지금 이 순간을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현재에 도달하지 못한 과거만을 살거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속에 삽니다. 처음에는, 금지의 법이 우리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법으로 금지의 법을, 금지로 인해 발생하는 욕망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첫번째 실패했을 때, 우리는 다시 죄의 속임수, 율법의 악순환으로 들어가기 쉽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사랑이 아닌 죄로, 율법으로 고정됩니다. 영적 사팔뜨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지혜는 다시 죄의 악순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무죄판결, 무죄선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계 7:8-9) 그 뒤에 나는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옥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 양이십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엄격한 남편, 율법처럼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슬퍼하시면서(산상수훈)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같은 죄를 100번 실패했습니까? 그게 인간입니다. 정말 그게 인간입다.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십시오. 이 문제는 교회도 안되고 예전도 안되고 목사님도 안되고 전도사도 안되고 남편도 안되고 상담사, 권력자도 안됩니다. 죽음을 이기신 권세를 지닌 한 분 그리스도 앞으로 내 중심을 가지고 나아가 낱낱이 아뢰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위선과 가면이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사랑, 그 은혜를 의지합시다. 세상에는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간혹 있으나 죽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무엇인가를 위한 사랑, 무엇 때문에의 사랑, 사랑을 먼저 받았기에 사랑해주는 그런 사랑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우리 안의 그 무엇, 자질 때문에, 사랑스런 외모 때문에, 인격적인 품성 때문에, 샤프한 지성 때문도 아니고, 공동체를 위해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나중의 이용가치를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잃어버린 양처럼, 우리를 그 분이 창조하신 귀한 생명으로, 죄와 죽음에 고통받는 그저그런 위선적인 죄인들임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어디다가 쓸려고 목적을 두고 만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와 사랑을 나누시기 위해 날 사랑하는만큼 널 사랑한다는 그런 조건없이 내가 이만큼 사랑하신다고 팔을 활짝 벌리셔서 십자가 가운데 피를 흘리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분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네 존재 자체가 필요하다고 우리들 각자에게 이 시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수단이나 목적이 아니라 그분 존재 자체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 정죄 없는 사랑 앞으로 나아갑시다. 또 무엇인가를 조작하려 하지 맙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때는 로마서 8장 1절처럼 그러므로 바로 지금, 이제 이 순간(ἄρα νῦν)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렇게 고대했던 카이로스의 놀라운 순간, 파루시아의 충만한 임재, 활짝 열려진 그 분의 거룩한 쉐키나의 존전 앞으로 들어갑시다. 예수님은 지성소를 두껍게 가리고 있던 몇센티나 되는 가죽으로 된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찟어 버리셨습니다.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1년에 한번 선택된 제사장만이 잠시잠간 밑을 들쳐 들어가는 인간적인 율법의 희생제의의 장막을 이제는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고 그 분의 지성소로 들어갑시다. 지성소는 십자가 전까지는 아무도 실제로는 나아가지 못했던 곳입니다. 이것을 누리는 방법은 그저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시는 높은 새 법(novalex)을 마땅히 행해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제발 멈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기도조차도, 예배조차도, 사랑의 실천조차도 그 어떤 종교적인 형식도 전혀 필요없습니다. 아니 쓸모가 없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복음만을 붙잡는 일사각오의 믿음뿐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전부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한번은 세계 최고의 줄타기 기술을 가진 분이 나이아가라 폭포 위로 줄 하나를 걸어놓고 건넜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줄 하나를 의지해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넌 제 실력을 믿지요? ”네, 믿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한 분만 나와서 제 등에 타고 저쪽으로 건너가시겠습니까?.”결과는 어떻했을까요? 네, 한명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믿음은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전 삶을 들어 던지는 “기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는 전무, 곧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전혀 쓸모없다는 전율할 만한 사실, 우리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진짜로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7-39)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모릅니다.(요일)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내 영혼의 닻을 이제 그리스도 안에 내려놓습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이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에서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 새롭게 된 하나님의 창조물로 형제자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그것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전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비웃었던 바로 그 일, 절망 가운데 비아냥거리며 조소했던 그 말을 우리는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긍정입니다. 당신은 다시 살았습니다. 당신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ἄρα νῦν)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를 죄인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몸을 싣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4)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을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0-13)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렘 29:13)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지금 현재 이제 이 순간에 임하시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복음,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 위에 굳게 섭시다.  온몸을 편안히 하고 우리가 뛰어 내린 절벽에서 부는 성령의 바람을 마음껏 누립시다. 우리가 거저 받을 수만 있다면 거저 주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자들이 아니지만 이 온전한 사랑을 사모한다면 점차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정죄와 판단, 분석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서로 사랑하며 은혜를 끼치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저도 이 시간 아직 제가 가는 부르심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여전히 반대하는 부모님과 가족들을 용서하기로 다시 한번 결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돌판에다가 문자로 새긴 율법을 선포할 때에도, 빛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비록 곧 사라질 광채이기는 하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그 광채 때문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에도 이러한 영광이 따랐는데, 하물며 성령의 직분에는,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정죄를 선고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으니, 의의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참으로 이 경우에 이제까지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이제 훨씬 더 빛나는 영광이 나타났으므로, 그 빛을 잃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도 영광을 입었으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 영광 속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이스라엘 자손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던 것과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완고해져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서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께로 돌이키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New Korean Standard Version;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Bible. Korean. New Korean Standard Version. 1993; 2003 (고린도후서 3:6-18). Korean Bible Society.

기도

우리 모두 우리의 연약함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똑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결코 죽지도 정죄의 악순환 가운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지금 이 순간 결코 정죄함이 없는 십자가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긍정 안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주님의 충만한 은혜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새로운 시작

거룩한가르침 2008/02/15 14:26 lacan
새로운 시작

1. 테터툴즈 고장나고 나서 다시 깔았어요.

2. 테터툴즈가 텍스트큐브로 업 되었네요. 그래서 텍스트 큐브 깔았슴다.

3.자료는 일단 다운 받아놓았으니 조금씩 다시 올립니다.